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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 - 신달자
인사동 상가에서 싼값에 들였던
백자 등잔 하나
근 십 년 넘게 내 집 귀퉁이에
허옇게 잊혀져 있었다
어느 날 눈 마주쳐 고요히 들여다보니
아직은 살이 뽀얗게 도톰한 몸이
꺼멓게 죽은 심지를 물고 있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안쓰러워
다시 보고 다시 보다가
기름 한 줌 흘리고 불을 켜 보니
처음엔 당혹한 듯 눈을 가리다가
이내
발끝까지 저린 황홀한 불빛
아 불을 당기면
불이 켜지는
아직은 여자인 그 몸
* * * * * * * * * * * * * * * * * * * * *
젊은 여자가 아름다운 것은
편견에 물들지 않은 까닭입니다.
많은 말들로 채워지지 않은 까닭입니다.
나이 많은 여자가 아름다운 것은
편견을 비운 경험이 들어 있는 까닭입니다.
말 속에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열정이 없는 젊음 뒤에는
체험이 없는 늙음이 따라간다지요.
어느 사진작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름이 많게 나온 여인에게
사진을 수정해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사진의 주인은 자신의 주름을
빼거나 넣을 수 없는 세월 그 자체라고 말하며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이는 자신에게 걸맞은 얼굴을 주지요.
나이에 걸맞은 행동을 할 때가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 아시지요?
오래전에 사둔 백자 등잔 하나.
꺼멓게 죽은 심지를 물고 있습니다.
불을 켜 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황홀한 빛을 밝히는 게 아닙니까?
아직 여자인 몸에 불이 켜지는 게 아닙니까?
박주택·시인
[시가 있는 아침(중앙일보 2008.06.28)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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