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년 전 크리스마스무렵이었다. 아내와 말다툼을 했다. 고래 힘줄같이 고집이 센 아내에게서 도망하고 싶었다. 아내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나는 속옷 몇 장과 읽을 책 한 두 권을 가방에 넣고 집을 나왔다. 출가가 아닌 가출이었다.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모텔에서 자기도 싫었다. 찾아갈 친구를 떠올려봤지만 없었다. 내가 간다는 것은 그의 일상을 파괴하고 쳐들어가는 행위였다. 더구나 그의 집에서 잔다는 것은 그의 생활 깊숙이 침투하는 행위였다. 젊어서는 몰라도 나이 먹은 지금에 와서는 그건 아니었다. 그래도 받아줄 친구를 한사람 한사람 떠올려봤다. 누가 자기 시간을 기꺼이 내줄 수 있을까. 문득 두물머리 강가에서 혼자 사는 대학 동기가 떠올랐다. 어려서부터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가 불편한 친구였다. 자주보는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를 생각하는 순간 어떤 원인모를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말했다.
“어서 오시오. 양수리 역으로 오면 태우러 가겠소.”
그가 흔쾌하게 대답을 했다. 그날 밤 나는 그의 침대에서 나란히 누워 같은 이불을 덮고 잤다. 그가 사는 집은 수도관이 얼어 터져서 물을 쓸 수 없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그의 집 구석방을 하나 얻어 그곳에 묵기로 했다. 창을 통해 냉기가 들어와 퍼지는 방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평생 아내가 모든 걸 해 준 나는 생활의 장애자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혼자 사는 친구에게 살림을 배우기로 했다. 그와 함께 시장에 가서 이불과 요를 사고 냄비와 숟가락 젓가락도 샀다. 세탁기 사용법 설거지, 청소, 김치찌개 끓이기등을 배우기 시작했다. 친구는 자기의 시간을 아낌없이 내주었다. 차가운 방에서 잔 탓인지 갑자기 허리가 아팠다. 친구는 나를 차에 태워 읍내 의원에 데리고 가서 진찰을 받게 하고 그 사이에 불편한 몸으로 처방전을 가지고 약국에 가서 약을 지었다. 그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면서 그동안 아내가 해 준 것들이 얼마나 큰 것인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내 허리의 통증을 보면서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사업가인 내 친구가 있어. 그런데 참 마음이 따뜻한 친구야. 침을 배워서 아픈 사람들에게 놓아주는데 진짜 명의야. 내가 한쪽 다리로만 지탱하고 사는 데 그 친구한테 침을 맞으면 아픈 다리에서 불쑥 힘이 솟는 거야. 침으로 기적도 많이 일으켰어. 그런데 특이한 건 자기가 침을 놓아주는 사람들에게 댓가를 받는 게 아니고 거꾸로 선물을 주면서 뭔가 항상 베푸는 거야. 천사로 밖에 생각할 수 없어.”
그의 권유로 침을 맞으러 다니면서 나는 마음이 따뜻한 친구 하나를 새로 얻었다. 좋은 부모를 둔 여유 있는 집안에서 자라난 사람 같았다. 그 부인도 만나봤다. 마음이 넉넉한 여성이었다. 며칠간 강가에 사는 친구의 집에 머물면서 밤이면 이런저런 지나온 삶을 얘기하다가 그가 문득 이런 말을 했다.
“내 고교 동창 중에 진목사라고 있어. 대기업의 임원을 하다가 신학대학을 가고 목사가 된 친군데 정말 증류수 같이 순수하고 따뜻한 친구야.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몰라. 나는 불교도지만 그의 순수한 삶을 보고 성경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니까. 고교 동기지만 내가 마음으로 멘토로 삼고 있어. 집을 나와 시간이 있는 김에 너 그 친구 한번 만나볼래? 만나서 성경이나 진리에 관한 얘기들을 나누면 아주 좋을 것 같은데. 나는 옆에서 그 말들을 들으면서 배우고 말이야.”
집을 나와 있는 일주일동안 나는 마음이 따뜻한 세 명의 친구를 얻었다. 마음이 따뜻한 친구와 함께 지냈더니 겨울인데도 춥지 않았다. 속에 있는 따뜻해진 마음이 육체에 온기를 준 것 같았다. 그들의 활짝 열린 마음을 통해 나오는 온기를 나는 만끽하고 있었다. 마음이 차가운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면 화려한 응접실이나 활활 장작불이 타오르는 벽난로 앞이라도 추웠다. 새로 만난 따뜻한 세 친구를 통해 누구를 도울 수 있을 때가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제 집으로 들어가라는 그들의 충고에 나는 그 해 마지막 날 집으로 돌아갔다. 집은 때마침 비어 있었다. 내 방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들었다. 몇 시간 후에 깨보니 돌아온 아내가 말했다.
“잘 다녀 오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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