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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내가 사는 법 - 엄상익 변호사

Joyfule 2022. 12. 20. 00:25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요즈음 내가 사는 법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실버타운의 뒷산 꼭대기에서 외로운 노인 세 명이 술잔을 나누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다. 굳이 ‘장자의 나비’를 꺼내지 않아도 인생의 허무를 얘기 할 게 틀림없어 보였다. 교장 선생님 출신의 또 다른 한 할머니는 실버타운에 오게 된 배경을 이렇게 말했다.​

“정년퇴직을 하고 혼자가 됐는데 그래도 번거로운 일이 많더라구요. 혼자 먹어도 장을 봐 와야지 아침 먹고 나서 설거지를 하면 금세 또 점심을 먹어야지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실버타운에 들어왔어요. 밥이 해결되니까 자유를 얻은 거죠.”​

내가 묵는 실버타운은 중산층 출신 소박한 노인들이 많다. 전직 교사, 군인, 공무원들이 많다. 파일럿 출신도 있고 잠수부를 하다가 온 사람도 있다. 나름대로 자존심을 가지고 여생을 알차게 보내려고들 한다. 기타를 들고 마을회관으로 가기도 하고 혼자 숨가쁘게 색소폰연습을 하기도 한다. 옆에 앉아 혼자 밥을 먹는 노인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맹방해변 쪽에 퍼블릭골프장이 있는데 이삼만원 밖에 안해요. 서울 근교에서 치는 것과 비교하면 십만원이상 싸요. 나는 매일 골프를 치러 가면서 하루에 십만원 씩 버는 기분이야.”​

서울의 고급 실버타운에 사는 법원장을 지냈던 법조 선배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요즈음의 실버타운은 좋은 점이 많아요. 그런데 고정관념이 박혀서 그런지 너무 나이가 들어서 힘이 없을 때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 분들은 수영장이나 헬스시설을 사용할 수가 없죠. 그리고 자체의 문화프로그램도 즐기지 못하는 것 같아요. 아직 건강이 있고 에너지가 있을 때 들어와야 충분히 시설을 이용할 수 있어요. 저는 거기 묵으면서 아침이면 서초동 나의 법률사무소로 출근해서 일을 하고 저녁에 퇴근해 돌아갑니다.”​

스무살 때 나는 마흔 살의 나를 생각하지 못했다. 나이 사십이 됐을 때 나는 일흔 살의 나를 상상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세월의 강물은 나를 인생의 바다 쪽으로 데리고 왔다. 실버타운에서 밥먹을 때 보는 분들의 얼굴이 앞으로 십년후의 내 얼굴이고 그들의 현재가 나의 미래일 수 있다는 걸 별로 반가운 일은 아니지만 이곳에 와서 깨달았다. 마음으로도 늙지 않겠다고 젊은 사람들과만 어울리려는 친구들이 많다. 그것도 나름 젊게 사는 방법이라는 생각이다. ​

그러나 받아들임과 마음을 여는 것도 노년의 구원 비슷한 건 아닐까. 나는 요즈음 인생의 남은 기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멘토로 삼는 두 분이 있다. 대학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냈던 김상협 교수의 평전을 쓰면서 그의 일생을 살펴본 적이 있다. 평생 정치학을 강의하고 모택동사상을 연구했던 그는 나이 칠십이 되면서부터 공부의 방향을 바꾸었다. 진지하게 여러 경전을 본 것 같았다. 동양철학자로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다석 류영모 선생은 작은 사업을 하다가 북한산 자락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경전을 읽고 일지를 쓰는 작업을 했다. 그가 쓰는 일지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매일하는 명상의 결과물이었다. 그런 삶이 아름답다고 여겨졌다. 보통의 사람들은 무엇으로 살까. 사십년 가까이 변호사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다툼과 싸움을 보았다.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것 같았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결국 욕심에서 나온 다툼이었다. 그들이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우는 일을 계속하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욕심 때문에 괴로워하고 넘어지고 분노하는 인생이었다. 헛것을 따라다니다 헛것이 될 뻔 한 것 같기도 하다. 요즈음은 더 이상 인간의 욕망을 따르지 말고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천재소리를 듣던 한 시인이 죽어가면서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

“저는 독서를 많이 한 편이었어요. 암에 걸려 이사하면서 그 책들을 다 보관할 수 없어 처분했죠. 그러면서 저승 갈 때까지 옆에 둘 책을 두 권만 남겼습니다. 그게 뭔지 아세요? 논어와 신약 성경이예요.”​

그는 지나치는 소리로 내게 말한 게 아니었다. 마지막 선물로 뭘 줄까 고심하다 전해준 말이었다. 나는 요즈음 여러 경전을 공부하고 있다. 그것들은 진리의 보물상자다. 성경속 시편 23장을 천 번을 목표로 필사하고 있다. 종이학 천번을 접으면 소원을 이룬다는 말같이 그런 마음이 숨어있기도 하다. 천천히 걸으면서 명상도 한다. 음악도 듣고 글쓰기도 한다. 인생의 숨쉬기 같은 그런 것들을 보다 일찍 했더라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