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레랑스
6.25 때, 함경도 사람이 부산으로 피난 갔다.
시장에 가보니 이상한 물건을 보여서 부산 사람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시기?”
부산 사람이 되물었다. “무시기가 뭐꼬?”
그러자 다시 함경도 사람이 되물었다. “뭐꼬가 무시기?”
그런 식으로 계속 “뭐꼬가 무시기? 무시기가 뭐꼬?”라고
서로 똑같은 의미의 말을 하면서 한 동안 설전을 했다.
살다 보면 그런 경우가 많다.
사랑하는 마음은 같고 잘되게 하려는 의도도 같다.
스타일과 표현이 다를 뿐이다.
그것을 이해하고 자기 소리를 조금만 낮추면 협력가능성은 조금씩 커진다.
승리자에게 꼭 있는 것은 협력 정신이다. 똑똑함보다 협력함이 중요하다.
다 똑똑하면 다 어려워진다.
똑똑해서 흩어지면 죽고 부족해서 뭉치면 산다.
참된 민주주의는 역설적으로 똑똑한 사람이 없을 때 번영한다.
한 학원에 이런 구호가 있다. “뭉치면 죽는다!”
재수생들은 뭉치면 죽지만 보통은 뭉쳐야 산다.
어려울 때는 뭉치기를 힘쓸 때다.
아무리 유능해도 혼자 얻는 행복은 없다.
자기 소리를 낮추면 전체 소망은 커진다.
자동차의 좌우측 바퀴 중에 한쪽 바퀴가 지나치게 크면 그 자동차는 빙글빙글 돌기만 한다.
바퀴를 맞추고, 호흡을 맞추고, 서로의 입장을 살피고,
서로 이해하고, 함께 짐을 나눠질 때 승리는 성큼 다가온다.
사람들은 가끔 말한다.
“저 사람 속을 도저히 알 수 없어!”
사람은 서로 모르는 것이 많다.
자신의 경험과 기준으로 남을 잘 안다고 판단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오래 같이 산 부부도 서로를 모를 때가 많다. 그래서 이해가 필요하다.
개와 고양이가 앙숙인 이유는 서로 모르기 때문이다.
개는 기분 좋으면 꼬리를 올리고 기분 나쁘면 꼬리를 내린다.
반대로 고양이는 기분 좋으면 꼬리를 내리고 기분 나쁘면 꼬리를 올린다.
그처럼 싸인이 맞지 않아서 오해가 생긴다.
개가 고양이를 만나서 반가워 꼬리를 들고 흔들면 고양이가 오해한다.
“저 개자식이. 왜 나만 보면 신경질이야.”
그래서 고양이가 인상을 쓰니까 이제는 개가 오해한다.
“저 고양이자식은 성격파야! 만날 때마다 저렇게 뻣뻣해.”
싸인이 다르면 싸움이 생긴다.
모든 사람은 성격도 다르고, 바디 랭귀지도 다르다.
그처럼 서로 다른 존재임을 알고 이해하는 것을 사회학적 용어로 똘레랑스(관용)라고 한다.
관용을 통해 남의 행동양식을 존중할 때 나의 행동양식도 존중받는다.
‘예절바른 것’은 인사 잘하고 교양 있는 것도 포함하지만
더욱 중요한 의미는 남과 나의 차이를 인정하고 관용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사니! 좀 바꿔!”라고 하는 것은 예의 바른 모습이 아니다.
예의 바른 태도는 “그는 나와 달라. 한번 이해해 보자.”고 하는 것이다.
그런 태도 속에서 차분히 서로의 단점을 고쳐나갈 수 있다.
다른 존재끼리 서로 관용할 때 대화가 열리고 갈등과 상처가 아물게 된다. (080326)
ⓒ 글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