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홀드 니버(1892-1971)
인간의 모순: 니버의 인간론의 중심은 인간의 상황의 특징이 되는 모순에 대한 그이 이해이다. 니버는 인간에게는 잠재력과 문제점, 즉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두 가지 현실이 공존한다고 했다.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서 그는 성경적 인간론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인간은 몸과 영혼 두 측면으로 피조된 유한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분리하는 견해들, 즉 모든 형태의 이원론적 인간론들은 배격되어야 한다. 둘째, 인간은 우선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성적 능력이나 자연과의 관계 등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인간 각 개인은 자신과 이 세상에서 벗어나서도 설 수 있는 자아이므로 그 자신과 이 세상 안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셋째, 인간들은 죄인이다. 그래서 죄 때문에 그들은 사랑의 대상일 수는 있어도 결코 신뢰할 수는 없다.
인간의 죄: 니버는 성경적 인간론의 세 가지 측면들 가운데 현대적 사고에서 가장 결핍되어 있는 것이 죄에 대한 개념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니버에 의하면 성경에 나오는 타락이야기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기 초월이라는 능력을 오용함으로 우리는 우리의 피조물됨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전체를 관망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스스로 속아서 우리가 그 전체인 양 생각한다. 그러므로 니버는 종교개혁적 사고를 유지하는 한편, 그가 파악한 자유주의적 경향과는 상반되게, 죄를 전인격적 행위로 봄으로써, 인간 존재의 어떠한 영역도 하나님에 대한 반역에 공모했다는 사실로부터 면제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죄가 보편적이고 면키 어려운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죄의 진리는 범죄의 잠재력이 우리 각자의 자아 속에 뿌리를 박고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니버는 원죄를 하나의 유전된 병독으로 해석하는 전통적인 해석을 거부하고 대신 죄의 발생이라는 보편적인 경험을 설명하기 위하여 키에르케골이 말한 불안의 개념에 주의를 기울인다.
니버에게 있어서 죄는 믿음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존성을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죄는 우리의 피조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죄는 두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동물적 본성으로 후퇴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부정하려는 시도인 관능에 빠지는 것이다. 둘째, 독립을 주장함으로써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교만의 죄이다. 교만은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표명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니버는 부언한다. "집단은 개인보다 그 목표들을 추구하는 데 훨씬 교만하고, 위선적이며, 자기 중심적일 뿐 아니라, 무모하기 때문이다."
수정된 신정통주의: 니버는 하나님의 계시가 이중적이라고 주장했다. 서적(또는 일반)계시는 각 사람이 위치해 있는 자연의 체계를 초월하여 한 개인의 삶에 초월적 실재가 부딪혀 오는 '각 사람의 의식 속에 있는 증거'이다. 이 사적 계시가 곧 계시의 이차적 차원, 즉 공적이며, 역사적인('특별')계시에 대하여 신임하게 한다.
이러므로 바르트의 경우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아무런 접촉점을 찾을 수 없었지만, 니버는 완전한 접촉의 영역들을 보았던 것이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동의하면서도 그는 인간의 잠재력, 심지어 자신을 죄인으로 볼 수 있는 잠재력을 보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면서도 그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배제할 만큼 하나님이 멀리 계시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는 계시가 인간의 이성에 대한 공격이라는 데 동의하면서도 인간이 진리를 인정할 수 없을 정도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요약하자면, 그는 신정통주의의 자유주의 비판에 참여하면서도 그 반대의 극단으로 옮겨 가는 것을 거부했고, 그것도 신학적인 이유에서 그렇게 했다. 시간과 영원이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면 하나님에 대한 의미있는 이야기는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니버는 중요한 교차점이 인격성의 영역에 놓여 있음을 발견했다. '인격체'란 삶의 과정을 초월하는 자유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그 삶의 과정과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불트만은 현대의 비신화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에게 신약의 메시지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그것을 비신화화하려고 했다. 반면, 니버는 성경의 신화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자체의 고유한 신화들을 통하여 현대의 상황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려고 했다. 그는 불트만이 과학 시대 이전적인 신화들(이것들은 "사건의 일정한 과정에 대하여 항상 알 수 있었던 것을 무시하거나, 그에 대하여 현재 알려져 있는 것을 무시한다")과 영원한 신화들("실재의 어떤 의미를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정확한 분석에 맡길 수는 없지만 경험 속에서 증명될 수 있는" 것들) 사이에 있는 분명한 차이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실패로 불트만은 '케리그마'속에 있는 진리를 보호하는 데서 부주의하게 되었다고 니버는 결론지었다.
자유주의에 대한 거부: 그의 비판의 핵심은 자유주의가 그 순진한 낙관주의 때문에 성경의 메시지, 특별히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경의 현실주의적인 이해를 상실한 것 같다는 것이다. 그는 처음에(1930년대) 마르크스적 사회주의자의 관점에서 자유주의를 공격했으나 그것도 자유주의와 유사한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초월적인 심판의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인정치 않고 있었고, 인류의 타락에 대하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낭만적인 인간관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두 가지 면에서 그는 어거스틴의 이해가 실제적 상황을 더 잘 반영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결과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어거스틴적 관점으로(1940년대) 전개되었다.
니버는 일찍이 자유주의에 대하여 불만족스럽게 생각했던 것을 모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그 결정체를 보여 주었다. "개인들의 도덕적 사회적 행위와 사회 집단의 그것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을 두어야 한다." 개인들이 "행위의 문제들을 결정할 때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관심사를 고려할 수 있을" 만큼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인간 사회와 인간 집단은 '거리낌없는 이기주의'에 더욱 빠지기가 쉽다. 그러나 니버는 개인의 도덕성에 대하여 순진한 낭만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인간 각 개인은 이타적인 충동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이기적 충동도 타고났다고 주장했다. 이 악한 충동은 개인들에게서보다 사회집단들 속에서 훨씬 더 거리낌없이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니버의 자유주의적 선배들이나 당대의 자유주의자들이 제시한 것과 같은 인간의 개발을 위한 모든 자조(自助) 프로그램들은 그 이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될 운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니버는 이러한 분석에 기초하여 '도덕적 삶의 이중적 초점'이라는 것을 제의하였다. 니버는 "사랑이 사회적 행동의 동기일 수 있지만 ... 자기의 이익 때문에 모든 측면에서 사랑이라는 규범을 무시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는 정의가 사랑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어거스틴적 통찰을 통하여 '도덕주의적 이상론'과 자유주의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감상주의'를 거부했다. 그 저변에는 사랑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보지 않고 단순한 하나의 역서적 가능성이라고 생각하는 그릇된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니버는 자유주의적 도덕주의가 세 가지 이유로 감상주의라고 주장했다. 첫째, 그는 자유주의와 상반되는 인간관을 견지하면서 그 차이에 근거하여, 그 속에는 죄의 힘과 심각성에 대한 깨닫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둘째로, 자유주의적 도덕주의는 복음에 나타나 있는 바 신앙적으로 숭고한 경지에 대한 것도 설명해 내지 못한다. 그것은 인간이 처한 곤경에 대하여, 죄의 용서와 죄를 이길 힘의 원천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선포하지는 않으면서 고작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만을 제시할 뿐이다. 셋째, 자유주의는 이상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 사이의 현격한 차이에 대하여, 즉 모든 인간적 사상들과 성취들을 초월하게 되는 사랑의 급진적인 모습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정치적 사회적 현실주의가 결핍되었던 것이다.
니버의 대안: 니버는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기독교적 현실주의'와 더 일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하나의 대안, 즉 성경이 말하는 신앙, 주로 그 히브리적 근원에 대하여 주목함으로써 도움을 얻고자 했다. 그는 서양 문화가 이 종교적 전통으로부터 두 가지 근본적인 강조점, 즉 '개체성의 의미와 뜻있는 역사의 의미'를 빌려 왔다고 주장했다.
다른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처럼, 니버도 시간과 영원과의 변증법적 이해를 통하여 건설적인 제안을 할 수 있었다. 영원한 것은 일시적인 것 안에 드러나는 것이지 그것에 의하여 소모되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테마가 삶의 의미 충만함이라는 뜻으로 성경에 제시되어 있음을 알았다. 역사와 인간 존재가 모두 의미있는 것이지만, 그들의 근원과 성취는 역사의 지평 너머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계는 상징적인 표현들로만 표현될 수 있다. 곧 영원과 시간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가 신화를 이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있는 것이다.
신화: 니버에 의하면 실제의 어떤 측면들, 예를 들어 인간이 처한 곤경의 본질이나 역사의 의미가 초월적인 것에 근거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이기 때문에 과학적이거나 합리적인 범주의 용어들로는 해득(解得)될 수 없으므로 신화가 필요하다. 신화는 궁극적 진리에 대한 상징들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초월적인 것은 신화들을 이용함으로써만 이야기될 수 있다. 니버는 이렇게 기독교의 상징들 속에서 의미의 초월적 근원을 가리키는 한 가지 방법을 발견했던 것이다.
니버는 자유주의와 전통적 정통주의 두 가지 모두로부터 자신을 구별한다. 자유주의는 과학적 방법, 삶에 대한 순수한 합리주의적 접근법 그리고 현대적 사고 등을 열애한 나머지 기독교 신앙의 신화를 저버렸다고 그는 주장한다. 한편 정통주의의 신앙은 "그 신화들의 문자적, 역사적 진실만을 주장한 결과, 시간과의 관련성 속에서 영원한 것을 말하는 것이 종교적 신화의 기능이며 특징이라는 사실과,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일정한 시간 안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진술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기독교 신앙의 신화들이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관계에 대한 선언들로서 옳게 이해될 때, 우리의 시대에도 의미 깊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타락의 신화"가 한 예이다. 니버에게 있어서 그것은 인간 역사가 시작될 때 일어난 한 사건에 대한 문자적 기술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유한함과 자유로부터 기인된 죄의 보편성에 대한 심오한 진술로 보았다. 그러므로 타락은 인간의 전 역사를 통하여 그리고 상황마다 인간이 처한 곤경을 힘있게 표현한 선언이다.
신앙의 삶: 니버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중심 메시지는 인간의 죄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하나님의 구원이다. 신앙은 '지성의 결론이기보다는 자아의 헌탁(獻託)이다.' 신앙은 궁극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삶으로 살아낼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라 용서에 의존한다.
십자가: 니버에게 기독교 신앙의 초점은 십자가이다. 기독교는 이같은 사건을 중심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계시적 사건이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인간의 곤경의 심각함을 보여주며, 간단히 말해서 인간의 완전이 역사 안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십자가는 역사 안에서 사랑은 죄의 힘 때문에 고통받는 사랑으로 남는 것임을 선언한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 이 상징은 하나님의 사랑과 죄에 대한 용서를 선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이되, '그 심판 아래 먼저 서 보았던 사람들'에게만 계시인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역사의 의미, 곧 사랑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것은 '사랑의 이상이라는 진리에 대한 신화인 것이다.
신적 초월성: 현대는 '계시 종교의 하나님을 이성과 자연의 하나님'으로 대치시키는 죄를 범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인간의 유한성과 피조성을 잊고 있다. 결과적으로 현대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상실했다. 즉 "인간의 의를 초월적인 의,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에 복속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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