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연대를 계산했던 사람 어셔
어셔 주교에 대한 휴 로스와 스테판 굴드의 대조되는 평가
(Hugh Ross v Stephen Jay Gould on Ussher)
by Jonathan Sarfati, Ph.D
오늘날 어셔는 점진론적 창조론자인 휴 로스(progressive creationist Hugh Ross)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랄한 조롱을 받고 있다. 휴 로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라이트풋(Lightfoot)과 어셔는 둘 다 히브리 학문을 무시했다. 그리고 성경적 연대기에 언급되어지지 않은 생략되어진 세대는 없는 것으로 가정했다. 그들은 또한 킹제임스 번역본(King James Version)을 기초로 하여,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의 날 수를 연속적인 24시간으로서의 6일로서 가정했다.”[1]
로스는 그가 공저로 지은 어린이들을 위한 RTB comic book에서 더욱 신랄하게 조롱하고 있었다 [2]
여기에서 어셔는 바보모자 같은 머리장식(dunce-cap-like headgear)을 쓰고 있는 한 멍청이로 묘사되어져 있다. (위의 풍자만화[3]를 보라). 이것은 로스가 자신은 높은 도덕적 수준을 가진 예의바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던 그의 주장이 거짓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어셔의 연대는 그 당시에 계산되어졌던 많은 연대들과 대략적으로 일치하는 것이었다. 어느 믿음이 최근의 탈선인가? : 오래된 지구 또는 젊은 지구? http://www.creation.or.kr/library/itemview.asp?no=1922)기사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 세상은 단지 수천년 전, 24시간 길이를 갖는 6일 동안에 창조되었고, 창세기 5장과 11장의 연대기에는 간격이 없다는 것이 기독교계가 가지고 있던 보편적인 견해였다. 따라서 그가 KJV 성경에 기록되어진 창세기 말씀에 기초하였다는 비난은 불합리한 것이다. 오늘날 KJV 성경은 거의 모든 영어성경 번역본들을 있게 하였다. 어쨌든, 이 두 학자들은 오로지 라틴어로만 기술하였다.
또한 그들이 히브리어를 무시했다는 로스의 주장은 매우 부적절한 것이다. 라이트풋은 라틴어와 헬라어뿐만 아니라 히브리어에 전문가였고, 구약을 포함하여 후대의 유대인들의 기록인 탈무드와 미드라시(Midrash)에 대해 능통하였다.[4] 어셔는 “당대에서 가장 위대한 학자 중에 한 사람”으로서 인정되어지고 있었다.[5] 그의 주요 저술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셈족 언어(Semitic languages)와 고대사의 전문가였다.
또한 몇몇 위대한 과학자들이 창조의 연대를 어셔의 연대와 매우 가깝게 계산하였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공공연한 비밀이다. 예를 들어 행성운동의 법칙을 발견한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는 BC 3992년으로 창조의 연대를 계산하였다. 또한 운동과 중력의 법칙, 미적분 등을 발전시킨 아이삭 뉴턴(Sir Isaac Newton, 1642/3–1727)은 모든 시대를 걸쳐서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성경적 역사에 관한 많은 글들을 썼고, 열심히 어셔 주교의 연대기를 방어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하였다 : “17세기 또는 심지어 18세기에 교육받은 사람들에서, 인류의 과거를 6천년 훨씬 뒤로 확장시키려는 어떠한 제안도 헛된 것이고, 바보같은 추정이다” [6]
나는 휴 로스가 풍자만화에서 어셔를 바보(dunces)로 조롱했듯이, 케플러나 뉴턴을 조롱할 것인지 궁금하다. 로스의 이러한 행동에 반해, 유명한 진화론자였던 스테판 굴드(Stephen Jay Gould, 1941–2002)의 반응은 대조가 된다. 그는 어셔를 매우 공정하게 다루고 있었다.[7] 굴드도 분명히 어셔가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어셔는 그 당시에 적용할 수 있는 가장 우수한 학문을 사용했다고 굴드는 말하고 있었다.
“어셔의 연대기는 그 당시 하나의 고귀한 하나의 노력으로서 변호되어져야 한다. 우리의 통상적 조롱들은 먼 과거의 다른 시대를 판단하는 데에 현재적 기준을 잘못 적용하는 유감스러운 편협된 생각으로 기록되어질 것이다.“
“어셔는 그 당대에 최고의 학자였다. 그는 수용된 방법론 하에서 하나의 공동 목표를 향해 나아가던 거대한 지식인 사회에서 실체적 연구를 계승한 사람이었다.”
“알 수도 없었고, 접근할 수도 없었던 후세의 기준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기준들에 의해서 평가를 내렸던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에 대해 나는 탄원하는 바이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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