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가 알아야 할 7가지 키워드 - 모험하라 - 존 맥스웰
일이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해낼 용기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해낼 용기가 없기 때문에 일이 어려운 것이다
(It is not because things are difficult that we do not dare; it is because we do not dare that they are difficult)
- 세네카
■ '흑인들의 모세'라 불린 리더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 1920~1913): 미국의 노예제 폐지론자.
남부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 탈출해 남북 전쟁이 일어나기까지 노예제 철폐에 앞장섰다.
‘지하 철도’(노예들을 탈출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진 치밀한 비밀 조직으로 여러 은신처로 이루어져 있다)의 탈출로를 따라
수백 명의 노예들을 자유로운 북부로 이끌었고 이러한 활약으로 ‘흑인들의 모세’로 알려졌다.
그녀는 그다지 인상적인 외모를 가진 여자가 아니었다.
30대 후반의 나이에 그저 150cm 좀 넘는 키에 흑갈색의 건조한 머릿결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단정해 보였지만 다 헤어지고 찢어져 있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사람들은 그녀의 앞니 두 개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혼자 살았다.
소문에 따르면 스물아홉 살 때 남편을 버리고 집을 나왔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에게 경고의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 지 수년 후 그녀는 단 한번 남편에게 말했을 뿐 이후로 다시는 그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는 직장도 다니다 그만두었다 했다.
대개는 작은 호텔에서 잡일을 했다. 바닥도 닦고 방 정리도 하고 음식도 했다.
하지만 매 봄과 가을에는 취직한 곳에서 사라졌다. 그리고는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왔다.
쥐꼬리만큼의 돈이라도 벌기 위해 다시 일을 했다.
한번 취직하면 열심히 일했고 육체적으로도 강인해 보였다.
하지만 갑자기 쓰러져 잠이 들 때는 발작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녀는 이런 고통이 십대 때 싸우다가 머리를 맞아서 그렇다고 했다.
이런 여자를 누가 존경하겠는가?
그러나 그녀를 존경하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따라 남부에서 탈출하여 자유를 얻은 노예들이었다.
그들은 그녀의 리더십을 보았고 그녀를 존경했다.
뉴잉글랜드에 있는 노예제 폐지론자도 모두 그녀를 존경했다.
때는 1857년이었고 그녀의 이름은 해리엇 터브먼이다.
지하 철로의 안내자: 해리엇 터브먼은 30대 나이에 ‘모세’라고 불렸다.
포로 지역에 들어가서 수많은 동족들을 노예의 속박에서 풀어 냈기 때문이다.
터브먼 자신도 노예로 태어났다.
1820년에 태어나 메릴랜드의 한 농가에서 자라났다.
열세 살 때 그녀는 머리를 맞았는데 그 통증이 평생을 따라다녔다.
어떤 가게에서 한 백인 감독관이 도망가는 노예를 때리고 있었는데 그녀에게도 동참하게 했다.
그녀가 이를 거절하고 감독관의 길을 막자 그는 터브먼의 머리를 향해 1kg이나 되는 쇳덩이를 던졌다.
그녀는 거의 죽을 뻔했다.
24살에 그녀는 존 터브먼과 결혼했다. 그는 자유를 얻은 흑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유를 찾아 북으로 도망가자는 얘기를 했을 때, 그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떠나려 하면 그녀를 돌려보내겠다고 말했다.
1849년 마침내 그녀가 기회를 잡아 북쪽에 가기로 결심한 뒤
그녀는 남편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홀로 그 일을 단행했다.
그녀의 첫 번째 자서전 작가인 사라 브래드포드는 터브먼이 해 준 말을 기록해 놓았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마음속에서 논리적으로 생각해 봤어요. 내가 갖고 있는 권리는 둘 중 하나였죠.
자유 아니면 죽음. 이것 아니면 저것을 가져야 했어요.
왜냐하면 아무도 날 살려 둘 리 없기 때문이죠. 나는 힘이 다할 때까지 자유를 얻기 위해 싸워야 했습니다.
터브먼은 지하 철로를 따라 펜실베니아 주의 필라델피아로 향했다.
이 길은 자유를 얻은 흑인들과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백인들과
노예들의 탈출을 도와주던 퀘이커 교도들의 비밀 도로망이었다.
그녀는 자유의 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메릴랜드로 돌아가서 가족을 데려오겠다고 맹세했다.
1850년 그녀는 지하 철로의 ‘안내자’로서 첫 번째 귀환 여행에 성공했다.
지하 철로의 ‘안내자’란 동조자들과 함께 노예들을 구출해 내서 북부까지 인도해 주는 사람을 말했다.
■ 강철 같은 리더
여름과 겨울이 되면 터브먼은 남부로 돌아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했다.
그리고 봄과 가을이 되면 목숨을 걸고 남부로 가서 더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귀환했다.
그녀는 겁이 없었다. 그녀의 리더십도 흔들림이 없었다. 이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데리고 나오는 사람들이 동요할 때면 그녀는 강철처럼 강해졌다.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한 노예들이 심하게 맞고 고문을 당해서
결국에는 자신들을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누설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이끌고 나온 사람들 중 한 사람도 중도에 포기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이 약해진 노예의 머리에 총알을 장전한 권총을 들이대며 말했다.
"죽은 사람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아요. 당신은 계속 가지 않으면 죽어요!"
1850부터 10년 동안 해리엇 터브먼은 3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인도해 냈다.
그중에는 그녀의 가족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19번의 여행을 했고 자신이 이끌고 나오던 사람들 중 단 한명도 잃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했다.
그녀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한번도 열차를 철로에서 탈선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단 한명의 승객도 잃지 않았죠.”
남부의 백인들이 그녀를 잡아들이기 위해 만이천 달러를 걸었다. 그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남부의 흑인들은 그녀를 ‘모세’라고 불렀다.
남북 전쟁이 시작될 즈음 그녀는 미국 역사상 그 누구보다 많은 흑인들을 노예제의 속박에서 구출해 냈다.
■ 행동으로 보여 준 리더십
터브먼의 명성과 영향력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녀를 존경하게 되었다.
자유를 꿈꾸는 노예들뿐 아니었다.
흑인과 백인의 영향력 있는 북부인들은 그녀를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그중에 윌리엄 시워드 상원 의원도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에이브러햄 링컨의 내무 장관이 된 사람으로서 적극적인 노예제 폐지론자였다.
그리고 그도 한때는 노예 프레드릭 더글라스였다.
그뿐 아니라 유명한 혁신적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존 브라운도 터브먼의 충고와 리더십을 듣고자 요청했다.
브라운은 언제나 그녀를 '터브먼 장군'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녀는 내가 본 어떤 장교보다도 훌륭합니다.
그녀에게 군대를 맡긴다 해도 그녀는 몇 명의 탈출자들을 인도할 때처럼 성공적으로 통솔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지도를 벗어나 행군하라
리더들은 위험을 무릅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무모하다는 말은 아니다.
좋은 리더들은 결코 무모하지 않다. 하지만 좋은 리더들은 안전한 길만 선택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도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안전하게 해낼 수 없다.
리더는 종종 사람들을 낯선 곳으로 인도하여 그들이 스스로 행군하게 해야 하다.
위험을 무릅쓰는 지혜로운 리더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보여 준다.
정보를 지혜롭게 모은다.
힘 있게 감행한다.
철저히 준비한다.
성공적으로 실패한다.
유연성을 보인다.
타이밍을 잘 파악한다.
얻을 수 있는 것을 상상한다.
문제점을 발견한다.
사명을 잊지 않는다.
올바른 동기들을 갖고 있다.
따르는 사람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다.
확신을 갖고 전진한다.
■ 당신 같은 사람만 있다면…
19세기의 순회 설교자였던 피터 카트라이트가 주일 설교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다가와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예배에 참석할 예정이니 거슬리는 말은 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카트라이트는 설교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오늘 회중석에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함께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말을 삼가라는 주의도 받았습니다. 제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앤드류 잭슨 대통령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입니다."
설교가 끝난 뒤 잭슨 대통령은 카트라이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서 말했다.
"목사님, 제게 당신 같은 사람들이 모인 연대 하나만 있다면 천하를 호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평생 단 한번의 기회
1940년 7월말 어느 아침의 일이다.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의 일본인 총영사 치윤 수기하라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영사관 문밖에 수많은 유대인 망명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폴란드에서 나치의 체포를 가까스로 모면하여 도피해 온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나치가 가까이 오고 있었기 때문에 또 다시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다.
그날 아침 그들은 수기하라에게 도움을 요청해 왔다.
왜냐하면 아직 리투아니아를 빠져나갈 방법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소련 연방(러시아)을 지나 일본에 갔다가 다시 카리브로 가서 자유를 얻는 것이었다.
단 하나 필요한 것은 일본 정부로부터 나오는 통과 비자였다.
출세가 유망한 40세의 외교관 수기하라는 비자 발급 허가를 받기 위해 즉각 도쿄에 타전을 했다.
하지만 정부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전보를 쳤고 재차 거절당했다.
세 번째로 연락하자 이번에는 거절당할 뿐 아니라 그만 요청하라는 명령을 들었다.
수기하라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권위를 존경하고 따르도록 교육받은 충성스러운 일본인이었다.
만약 그가 명령을 무시한다면 분명 그의 가족은 수치를 당할 것이며 목숨까지도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도록 교육받은 사무라이 집안 출신이었다.
게다가 그는 젊은 시절에 개종한 크리스천이었다.
그의 선택은 분명했다. 그는 아내 유끼꼬와 함께 29일 동안 꼬박 통과 비자를 발급하는 일에 매달렸다.
일반적으로는 한 영사관에서 한 달에 300개의 비자를 발급한다.
하지만 수기하라는 하루에 그보다 더 많은 비자를 발급했다.
그는 비자를 발급하느라 샌드위치로 대충 식사를 해결할 때가 많았다. 잠도 거의 못 잤다.
1940년 8월 28일 정부는 수기하라에게 영사관을 닫고 도쿄로 오라고 명령했다.
그래도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비자 발급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탄 기차가 역에서 출발하는 순간에도 그는 비자에 사인을 해 주고 있었다.
기차가 역을 출발해 속도를 내서 더는 사인을 해 주지 못하게 되자
그는 어느 망명자에게 아예 영사관 비자 스탬프를 던져 주었다.
수기하라는 이후로도 몇 년 더 외교계에 잔류하다가 쫓겨났다.
정부 리더십으로 일하던 시대가 끝난 것이다.
일본에 돌아와서 그는 파트타임으로 통역 일을 했다.
후에는 러시아어를 조금 알고 있은 덕에 수출 회사 지배인을 지내면서 근근이 살아갈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동안 리더십으로 살아간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길을 보여 주기 위해 단 한순간의 기회를 얻는다.
치윤 수기하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기회를 최대한으로 사용했다.
그의 리더십으로 독일의 집단 수용소에서 목숨을 건진 유대인이 6천 명이 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나치로부터 탈출한 유대인 중 두 번째로 큰 규모였다.
1985년 수기하라는 이스라엘의 최고 훈장인 ‘열방 중 의인’을 받았다.
치윤 수기하라는 자신의 리더십을 가치 있게 만들었다.
당신도 리더가 될 기회가 주어질 때 그렇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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