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끄는 풍경 - 김동삼
내 고향 堤川에는 '淸風文化財團地'라는 곳이 있다. 忠州에 댐이 생기면서 82년부터 3년여에 걸쳐 남한강변 수몰구역에 산재하여 있던 옛 청풍부의 각종 국보급 문화재에서부터 전통한옥과 조상들의 생활유물까지 모두를 이곳에 옛 모양 그대로 이전을 해둔 곳이다.
文化財團地 東쪽으로는 비단을 수놓은 듯한 錦繡山이 장엄한 일출을 선사한다. 南쪽으로는 작은 金剛이라 불리는 月岳山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西쪽으로는 鳳이 날아갈 듯한 모양의 飛鳳山이 노을 속으로 날아갈 듯 날개짓하며, 北쪽으로는 듬직한 大德山이 호수에 발목을 담그고 있어 운치를 더해 준다.
옛 청풍부의 관문이던 팔영루를 지나 團地 내에 들어서면 노란 산수유 꽃의 재잘거림이 눈길을 끈다. 우아한 여인의 기품을 지닌 백목련이 은은한 웃음으로 맞는다.
정원 안에는 옛 관아들을 옮겨놓은 관아群과 고인돌과 오래된 비석들을 모아 배치한 비석群이 있고, 서민의 생활터전을 옮겨 놓은 古家群이 있다. 자연스런 어우러짐이 마치 한 고을을 옮겨 놓은 듯 하다.
첫 입새에 위치한 古家群에는 다섯 채의 오래된 집이 있고, 조상 몇 대를 물려받았을 연자방아가 古家들의 중간쯤에 위치하여 옛 생활을 공유했던 공간임을 짐작케 한다.
특히, 이곳 古家들은 각각 다른 양식으로 지어져 전통고가와 선조들의 생활상 연구에 활용되고 있는 귀중한 사료이기에 그 느낌이 여늬 가옥과 다르다.
이곳에서 자동차로 30여분 거리의 가까이에 살다보니 일요일이면 휭 하니 바람을 쐬러 오는 이곳은 자주 보아 그런지 어릴 때 살던 집처럼 구석구석의 모습이 눈에 익은 것 들이다.
古家에는 지금은 흔히 볼 수 없는 생활용품들을 볼 수 있어 옛 정취를 맛 볼 수 있다. 짚으로 만든 둥구마리, 가마니, 멍석 등과 물레며 가마니틀과 베틀, 그리고 함지박 속의 복(福)字가 새겨진 하얀 사기 그릇, 그을린 부엌 안의 커다란 무쇠 솥,화로, 호롱 등 모두가 옛 모습 그대로이다.
문고리가 닳아빠진 여닫이문안에서는 토닥토닥 다듬이소리가 들릴 것만 같고, 흰옷을 입은 할머니께서 입을 오물거리며 맞아줄것만 같다.
집을 둘러싼 삐뚤거리는 토담에는 황토 흙 사이로 간간이 돌들이 섞여 박혀있다. 토담은 작은 키도 깡충거리며 안을 기웃거릴 만큼의 아담한 높이이다. 토담 위에 엎드려 있는 용구새의 흐트러짐은 비녀를 지른 할머니 귀밑머리의 삐침처럼 단정함 속에 어울리는 일탈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뜰의 양지바른 곳. 어김없이 장독대가 위치하고 있다. 아이들 키 만한 독에서부터 앙증맞게 만든 항아리까지 늘어서 키 재기하는 모습에서 몇 대가 함께 살았던 시절을 그리기에 충분하다.
조용히 그 앞에서 눈을 감으면 달빛 어린 막사발의 정안수와 희망의 촛불 앞에 선 할머니 어머니의 합장한 모습이 보인다. 그곳은 여인네들의 바람과 집안의 희망과 신이 머물던 신성한 곳이었다.
뒤안 음습한 곳. 어머니 아버지 눈에 금방 띄지 않으니 그곳에서 가끔 못된 짓도 하던 곳이다. 어쩌면 그곳은 비밀스런 곳이기도 했고. . .
몰래 불장난을 하다 나뭇가리를 태운 곳도, 죄없는 개구리를 잡아 괴롭히던 곳도 옆집 계집아이와 소꿉놀이를 하다 배리가 틀려 쥐어박던 곳도 그곳이다.
어디 그 뿐이랴. 정월 보름께 돌리던 망우리 깡통을 집안에 들여놓으면 귀신이 따라온다고 집안에 들이지 못하게 하였건만 음침한 그곳의 장작 더미사이에 꼭꼭 숨겨 놓기도 하고, 개 딱지를 따다 숨겨놓던 나만의 장소이기도 한 곳이다.
그 곳이 그렇게 비밀스러울 수 있었던 것은 살림에 급히 쓰지 않는 물건들을 보관하여 두므로 크고 작은 틈바구니가 많았고 어른들의 손길이 뜸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뒤안의 담으로는 담쟁이 넝쿨이 진을 치고 있다.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있는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할아버지 팔뚝의 핏줄처럼 툭 불거진 연륜 지닌 굵은 줄기가 있는가하면, 막 내미는 새순 쪽의 넝쿨은 톡 건드리면 붉은 피가 왈칵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아이 팔뚝의 핏줄 같은 싱싱함이 있다. 몇 대가 어울려 사는 모습 그대로 이다.
古家. 할아버지의 곰방대 터는 소리·아버지의 큰 기침소리· 어머니의 그을린 앞치마가 있고, 몇 대(代)가 복작대며 두레상에 마주하고 살던 대 가족의 모습이 남아있는 곳.
비록 가난했지만 질서와 위엄이 있고 궁색하다고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고결한 삶이 이곳에 남아 있다.
요즘의 생활공간은 한치의 땅도 여유가 없어 잡초 한 포기에게도 내어줄 공간이 없는 인정머리 없는 배려이다. 그런 잿빛 공간에서의 삶은 생각조차 각이 진다. 전통고가에서 느끼는 여유와는 대조적인 공간이다.
마음이 산란스러울 때면 옛 정감을 맛 볼 수 있는 古家를 찾을 일이다. 토담아래서 흙장난 치며 사금파리 조각과 꽃잎을 뜯어 소꿉놀이하던 옛 시절을 떠 올려 볼 일이다.
크고 작은 장독들의 올망졸망하고 수더분한 조화와 토담 위 용구새의 흐트러짐에서 잠시 여유를 느껴봄은 어떨까
미래문학 제8집 2003년 봄호)
2003년 10월 개작
'━━ 감성을 위한 ━━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락논 예찬 - 김동삼 (0) | 2012.09.22 |
---|---|
세상에 휘몰리는 자화상 - 丘仁煥 (0) | 2012.09.21 |
따뜻한 선물 - 홍미숙 (0) | 2012.09.19 |
여름을 보내며 - 김동삼 (0) | 2012.09.18 |
고무신 한 켤레 - 김해남 (0) | 2012.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