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논 예찬 - 김동삼
다락논 한 쪽에선 뱀이 개구리를 물었는지 "꾸국 꾸국" 하는 비명이 들린다. 섬짓한 느낌에 발 밑을 둘러보며 논둑길을 지났다. 숨이 멋도록 후덥지근한 열기가 뭇 풀벌레들의 노래를 늘어지게 하고, 불청객의 발길에 놀라 그쳤다 이어짐을 반복하고 있다. 논둑 길 끄트머리. 산비탈을 안고 도는 도랑에는 찔레 넝쿨이 터널처럼 우거져있다. 더부룩하게 자란 넝쿨 아래선 금새라도 무엇이 뛰쳐나올 것 같은 음산한 기운이 돈다. 그 아래 돌 틈에는 아직도 가재들이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하고. . . .
아버지 새참을 들고 이곳을 찾으면 돌 틈 속의 가재를 잡아 저녁 한나절 가지고 놀 거리로는 그만이었는데. . . .좁은 가재 굴에 손을 넣어 손끝에 만져지는 딱딱한 껍질이 느껴지면 혹시 집게에 찝히지는 않을까 재빠르게 낚아 내곤 했었다. 그 곳을 지나 양지녘 산비탈에 이르면 산딸기 넝쿨이 진을 치고 있다. 발갛다못해 검붉게 농익은 산딸기는 지금의 하우스 딸기와 비교할 수 없는 자연의 맛 이기에 그 맛의 비교는 산딸기에 대한 모독이다. 시큼함과 달콤한 맛의 조화는 공해에 찌든 토양에서 생산된 요즘의 어느 과일도 견줄 수 없는 신선과 였다는 생각이 든다.
다락논 맨 꼭대기. 그 곳에서 내려다보는 골짜기 논은 참 넓다는 생각이 든다. 가르마처럼 타진 논두렁도 보이지 않고, 맨 아래 가장 커다란 논이 신작로와 경계를 이루고 양쪽의 산을 경계로 골짜기 가득 한 다랭이의 논으로 보이니 말이다.
다락논은 가을을 맞아 멋의 절정을 이룬다. 골짜기 가득한 누런 벼이삭이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이란 마치 황금을 빠뜨린 강물의 출렁임을 보는 듯 하다. 또한 다락논의 구불구불한 논두렁을 한나절 동안 엎드려 치성드리듯 깍고서 쳐다보면 방금 이발을 한 아이의 뒤통수를 보는 것 처럼 단정해 보인다. 조회시간 맨 뒷줄에 서서 가까머리 친구들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것처럼. . . .
아버지께서는 새참을 가지고 온 나에게 "어떤 농부가 맥고자를 벗어놓고 담배를 피우며 자기 논을 세어보니 논 한 다랭이가 보이지를 않더란다. 아무리 세고 세어보아도 모자라 아하! 이제 한 다랭이는 잃어 버렸나 보다하며 모자를 들고 일어서니 모자 아래 한 다랭이가 있더란다" 하신다. 뚱 부은 모습으로 논에 새참을 가지고 온 나에게 그런 우스갯소리가 재미있게 들릴 리가 없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한참 재미있을텐데 칠월 땡볕을 쐬며 시오리 황토 길을 걸어서 새참을 들고 온다는 것은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기에 아버지의 그런 말씀은 마음에 와 닿지도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께서는 상한 내 마음을 다소 누구러뜨려 준다고 한 말이었을 것인데. . . .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다락논에 모내기와 피사리도 해 보면서 아버지의 아픔과 어려움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논두렁을 깎아보면서 그 다락논은 참 아기자기한 멋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의 그 때 말씀이 새삼 재미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언젠가 산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던 저녘무렵, 좁고 기다란 논에서 시간에 쫒기어 모내기 마무리를 할 때 나는 논의 저쪽에서 아버지께서는 논의 이쪽에서 한참을 정신 없이 모를 심으며 뒷걸음질치다 서로 부딪쳐 논바닥에 주저앉았다.
"허 ! 참 ! 논이 손바닥만하다보니 별일도 다 있구나 !" 하신다.
그래서 부자가 논바닥에 앉아 한 바탕 웃어보는 일도 있었다.
다락논은 지루하지 않은 멋이 있다. 모내기를 하여도 허리 아프다 싶으면 한 다랭이가 끝이 난다. 논두렁을 깍아도 구불구불 다른 모습이어 자연의 멋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모습이란 마치 엽집 기집애 가르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일요일 어머니를 따라온 그 아이의 어설피 타진 가르마처럼 삐뚤거리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다락논은 평지 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아기자기함과 여유로움이 있다. 구불구불한 논두렁을 경계로 작은 나라들이 위치하는 듯 하고, 자딸아 빠진 크기에도 바위 한 두개쯤은 눌러앉을 여유가 있었다. 그 바위는 복 바위라 불리우며 비 오는 날 개구리도 쉬어가고 따뜻한 날이면 잠자리도 앉아 졸며, 메뚜기며 참새가 사랑을 나누는 곳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새참 때 막걸리와 초할아비가 된 열무김치. 퉁퉁 불은 칼국수가 어울리는 식탁이 되기도 했던 천덕꾸러기가 아닌 복덩어리로 대접을 받았던 것 같다.
오직 돈 돈 하는 세상이다. 이제 다락논은 일손이 모자라니 네 하고픈 대로하라는 식으로 묵어 자빠져있다. 바랭이와 쇠괭이 풀이 진을 치고 쑥대가 솟아올라 산이 되어 버려 이제 더 이상 정감이 가는 땅이 아니다.
어렵던 시절. 한치의 땅이라도 일구어 곡식 한 알이라도 더 거두려는 농부의 알뜰함은 어디로 갔나. 모든 것이 풍요롭게만 느껴지는 생활 속에서 근면하고 검소하게 살아온 시절을 망각하고 사는것은 아닌지?
다락논의 아기자기한 추억과 알뜰하게 가꾸어오던 시절을 떠올려 보면 어렵던 시절의 작은 일들이 잡초에 묻혀버린 것 같아 이쉬움이 더한다.
제천문학 2002. 49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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