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세상에 휘몰리는 자화상 - 丘仁煥

Joyfule 2012. 9. 21. 11:08

 세상에 휘몰리는 자화상 - 丘仁煥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향기롭다. 짓푸르게 우거진 보라매 동산에 청랑(晴朗)하게 우는 맑은 꾀꼬리 소리와 구슬픈 두견새 소리,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제각기 목소리로 우는 새들의 소리가 멎고 빗줄기만 가랑잎에 부딪는 소리가 정적의 심미를 느끼게 한다.

아파트 창가에 선 채로 빗소리에 섞여 잎에 부딪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짙은 녹음으로 우거진 산을 바라본다. 가슴 깊이 녹음의 향기가 빗소리와 수놓으며 다가온다. 심호흡을 하듯 깊이 마셔본다. 시원하게 가슴이 맑아지는 것 같다. 한 마리의 까지가 빗속을 날아간다. 그 날아가는 까치가 짓푸른 녹음에 채색되면서 눈을 다사롭게 한다.     
  

그 눈빛에 멀리 희미하게 다가오는 한 영상에 끌려가다가 발을 멈춘다. 헝크러진 자화상이 서서히 제 모습을 들어내고 있다. 어딘지 모르게 허술한 것 같으면서도 앞으로 내달으려는 두 주먹을 볼 수 있다.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치달았기에 지치면서 앞으로 가려는 것인가.

<해바라기>의 고호의 친구인 고갱이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가 가슴에 강하게 와닿아 뭉크의 <절규>와 같이 무엇인가 절규하고 싶은 심정이 감돈다. 모처럼 착 가라앉은 마음으로 자화상을 바라보며 자문을 한다. 정말 무엇을 위하여 이렇게 뛰어 오고 앞으로 달려가려고만 해야 하는가. 그렇게 달려 와서 어떤 성(城)을 이루어 놓았는가. 정말 난 잘 살아 왔고, 살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세상이 정신없이 변해간다. 그 변하는 세상을 따라가기가 어렵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은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이젠 눈 깜짝할 사이에 세상이 달라진다. 여간 정신 차리지 않고는 자기가 어디에 서 있고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다. 세계 경제 10위의 대국이요 한류의 열풍이 불고 아이티의 첨단을 선도하는 나라, 세계 조선소에서 1위에서 5위까지 차자하고 있는 나라, 후진국에서 선경제 발전 후 민주주의로 선진화에 성공한 나라, 모두가 정신없이 달려 온 도정이 결코 순탄하지 않은 가운데 이룩한 한강의 기적의 덕으로 잘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모두가 될 수는 없지만 세계에서 이렇게 좋은 집에서 잘 입고 잘 사는 나라가 그리 많지 않다. 퇴근하고 나서 저녁에 이렇게 사람이 많이 나와 끼리끼리 모여 술도 마시면서 활기에 넘치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분단의 한과 위기 속에서 노점상이 어기차게 종일 장사는 옆에 이동 천막에서 한잔의 소주를 마시면서 하루의 회포를 나누는 서민이나 밤을 새우면서 선진산업국의 역군인 근로들이 내일의 꿈을 영글이는 살아가는 우리의 영상이다.

영국 레스타대학의 레이드리안 화이트교수 팀이 178개국의 건강 재산 교육 등을 중심으로 연구해서 발표한 '행복지도'에서 덴마크가 1위이요, 미국은 23인데 한국은 102위로 발표하여 82위인 중국 90위인 일본에 뒤진다고 발표하고 있으나. 그것은 거의 신빙하기 어려운 것이고 우리는 갈등과 빈부의 차이는 있다고 해도 모두 잘 살려고 두 주먹을 쥐고 앞으로 치닫는 나라다. 물론 정치나 국제정세에 의해 요동치고 시끄럽고 많은 분야에서 부정적인 어둠이 도사리고는 있기는 해도 자유 민주주의가 성숙되어 가고 행복의 추구에 청신호를 키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행복 지수의 질량이 어떤가에 달려 있다. 그 행복의 질량을 모두 동일하게 누려야한다는데 한국사회의 혼돈한 소용돌이를 볼 수 있다. 대학 입시를 비롯하여 사교육, 이기적 투쟁으로 치닫는 노조, 치부하고 명예와 권력을 얻으려는 부정과 사기 천국이 되었다고 개탄하는 것도 바로 행복 지수를 돈과 권력과 명예에 의한 자기 성취로 보는 데서 오는 것으로 시급히 청산해야 할 현상이다. 공동체가 평등한 행복지수 속에 만족하고 살 수 없다는 이미 사회주의 실패로 입증된 것이다. 또 사람은 태어날 때 유전자에 의해 재능과 사라오는 환경은 제각각 다르다. 그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능력도 같을 수가 없다. 그러니 갑의 행복이 반듯이 을의 행복이 아니고, 을의 행복의 병의 행복이 될 수가 없다.

 아무리 보도매체가 발달하여 지역 공간을 초월한다고 해도 누구나 풍미한 돈 지상의 획득에 의해 행복을 누릴 수는 없다. 한국의 전통은 부(富) 귀(貴) 수(壽)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의 오복(五福)으로 행복지수로 여기며 실천해 왔다. 부를 앞에 놓고 있지만 덕을 좋아해서 베푸는 유호덕으로 감싸 고종명의 복을 받는다. 미국의 사회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람은 habing→keeping→faming→being이라고 많이 벌어 그것을 지키고  명성을 얻고 정말 삶의 누리는 본성을 지니고 있는데 미국 자본주의는 갖는데 치중하고 있어서 삶을 누리려야 한다고 자본주의를 신랄히 비판하고 있다. 
 

정말 나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자기만의 성취의 삶이 바로 행복의 공간이다. 송사리떼처럼 남을 뒤따르지 말고 나만의 행복지수로 그 삶을 성숙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누려야 한다.
한꺼번에 큰 행복을 얻어 부등켜안으려고 하지 말고 작은 행복 곧 소복(素福)을 누릴 때 큰 복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큰 일을 작은 일로 생각하고 잘 될 거라는 긍정적인 자세로 하면 된다는 자신감으로 전력을 다하면 행복의 오붓한 삶이 산록을 물 드리는 녹음과 같이 푸르게 살쪄 갈 것이다.       
                                                - <문학미디오.2006.가을>

丘仁煥(소설가.서울대명예교수 문학과문학교육연구소 소장)

 

'━━ 감성을 위한 ━━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빈 새 - 김민식   (0) 2012.09.23
다락논 예찬 - 김동삼  (0) 2012.09.22
마음을 끄는 풍경 - 김동삼  (0) 2012.09.20
따뜻한 선물 - 홍미숙  (0) 2012.09.19
여름을 보내며 - 김동삼  (0) 2012.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