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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 김후란

Joyfule 2005. 5. 25. 01:04


만남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 김후란  
나는 어떤 모임에서 노래를 해야 할 입장이 되면 
노래 대신 내가 좋아하는 시를 암송하기도 한다. 
자작시를 할 때도 있지만 귀하게 만난 사람들의 특별한 모임에서는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를 읊는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 시를 듣고 사람들은 가슴이 뜨거워진다고 했다. 
시를 적어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만큼 공감대가 큰 모양이다. 
우리는 살아가는 길에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대다수지만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유독 
나를 사로잡은 별 하나처럼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유독 가슴에 점 하나 콕 찍히듯 잊히지 않는 눈길이 있기 마련이다. 
그 눈길이 인연이 되어 평생 함께 가는 배필이 되기도 하고 
사랑해선 안 될 사랑에 눈물짓게도 된다. 
그런 인연의 고리를 저어하면서 살아가지만 어쩔 수 없이 
운명의 고리에 얽히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게 인간사가 아닌가 한다.
만남이란 어디 사람과 사람만의 일이겠는가. 
시인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래서 시를 쓰게 되지만, 
나도 김광섭 시인처럼 어떤 만남의 인연에 의미부여를 하곤 한다. 
산에 가면 나무나 바위 하나하나에 마음의 눈길을 주게 된다. 
잠시 땀을 들이면서 쉬다가 무심히 눈에 띈 작은 풀꽃 하나에 반해서 
마음을 뺏기기도 한다. 
마치 그 풀꽃이 나를 기다렸다가 반겨주는 듯, 
너와 나와의 만남이 이미 오래전에 예정되어 있었던 듯이 나를 끌어당긴다. 
어느 쪽에서건 마치 짝사랑하듯이 이런 만남을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것이다.
나는 지난 4월 초 아리따운 신혼부부 80쌍을 인솔해가서 금강산 온정리 근처 
산허리에 3천 그루의 전나무 묘목을 심고 돌아왔다. 
신혼부부 나무심기는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운동을 펼치고 있는 
유한킴벌리가 22년째 서울 근교에서 해온 행사인데, 
올해는 내가 공동대표로 있는‘평화의 숲’과 함께 처음으로 
북한지역을 선정해서 시행하게 된 것이다.
‘평화의 숲’은 그동안 금강산 근방과 평양 근교에 양묘장 설치와 
묘목심기를 지원해왔고 임업에 필요한 묘목, 나무종자, 비료, 임업기구 등을 
황해바다를 거쳐 제3국 배편으로 북측에 지원해왔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금강산 관광이 육로로 개통되었기에, 이번 나무심기는 
버스 다섯 대를 동원해서 비무장지대를 지나 남측 세관과 북측 세관을 거쳐 
현지에 도착했다. 
이 행사가 무엇보다도 뜻 깊었던 건 남한의 신혼부부들이 
북한 땅에다가 나무묘목을 심었다는 사실이다. 
4년 전 산불로 버려진 채 있었던 야산에 나무심기를 한 이 행사는 
그들 젊은이들에게 일생 잊을 수 없는 감격스런 추억이 될 것이며, 
미래를 향해 희망과 꿈을 심는 일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오늘의 금강산과의 만남, 
금강산의 저 바위와 나무와 풀과 물과의 만남을 깊이 가슴에 새기라. 
지금 그대들이 심은 저 묘목들과의 깊은 인연에도 사랑의 마음을 전하라. 
이 다음에 아이들 손을 잡고 이곳을 다시 찾아와 그대들이 심은 나무들이 
얼마나 자랐는지 보라”고 했다. 
나 역시 금강산행은 처음이었다. 
우리나라의 자랑거리인 금강산을 직접 내 눈으로 볼 수 있고 
그 산자락을 내 발로 걸어본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더구나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그곳에 내 손길로 전나무 묘목을 심는 
보람찬 행사여서 피곤한 줄도 몰랐다. 그냥 꿈만 같았다. 
남한에서 눈 떠 자란 전나무 묘목도 금강산까지 와서 
뿌리를 내리게 된 운명에 스스로 놀라고 또 대견해할 것도 같았다.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만남이 또 하나 있다. 
어느 해 여름, 친구와 함께 낯선 개울가로 산책을 갔었다. 
모처럼 찾아간 그 개울은 물줄기는 거의 마르고 자갈만 잔뜩 깔려 있었다. 
우리는 덥기도 하고 실망도 커서 그냥 자갈밭에 앉아 별반 특색도 없는 돌을 
이것저것 건드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와 나와의 만남이 불꽃을 튕겼다. 
손바닥 안에 드는 자그마한 납작한 돌인데, 돌에 새겨진 무늬가 
사물놀이 패의 한 사람이 길게 늘어진 흰줄을 날리면서 
상모를 돌리는 춤추는 사나이의 형상이었다. 
사나이가 신나게 춤을 추다가 그 돌 안에 그대로 화석이 되어 있었다.
얼마나 오랜 세월 그는 나와의 만남을 기다리며 
그 자갈밭 속에서 흐르는 물결에 씻기며 견뎌온 것일까. 
나는 가슴이 뛰었다. 소중히 두 손으로 감싸 안고 집에 가져왔다. 
내 책장 유리장 안에 그 화석은 아주 귀한 손님으로 모셔져 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경험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내 가족과의 인연이 신기하고, 내 주변의 친구들이 고맙다. 
또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다 각별한 인연으로 다가선다.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나무와 돌, 바닷가 모래밭에서 주운 조가비, 
아름다운 꽃, 윤기 나는 나뭇잎, 애틋한 작은 풀꽃, 
창밖 나뭇가지에 앉아 나를 들여다보는 새, 
나를 정겹게 바라보는 개, 
하물며 읽고 있는 낡은 책에 기어가는 아주 작은 점 하나 같은 벌레까지도 
어쩐지 나와의 만남이 가슴에 찡하게 다가온다.
나는 이렇게 어떤 인연의 만남에도 의미부여를 하고 크게 중히 여기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웬만한 것은 버리지를 못한다. 그러나 과감히 떨쳐버려야 할 때도 있다.
그리움만 안고 지나쳐버려야 하는 많은 인연들, 
아릿하게 가슴을 찢는 만남과 헤어짐,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나와 눈길이 마주쳤던 별 하나, 
그리고 어디서 다시 만날지 기약이 없는 인연들, 
이런 게 인생사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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