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성균 수필 연재 - 混淆林(혼효림)
우리나라의 산을 지키는 나무를 대별하면 소나무와 참나무로 나눌 수 있다. 두 나무를 어느 나무가 더 좋고 나쁘다고 우열적(優劣的)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고 참나무는 참나무다. 각기 개성적인 장단점을 타고난 상호보완적인 나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참나무는 잡목이라고 천시하고 소나무만 편애해 왔다.
물론 소나무가 참나무보다 우수한 재목의 자질(資質)을 타고 난 것만은 사실이다. 특히 건축재에서는 탁월하다. 경복궁, 남대문 문루, 부석사 무량수전등 국보급 목조건물의 재목은 물론, 화전민의 너와집 재목도 소나무다.
소나무는 도편수의 의중(意中)을 잘 받아들인다. 대패질이나 끌질에 대항하는 법이 없다. 마름질과 다듬질하기가 쉬운 연목(軟木)인데 비해서 오랜 세월동안 축조미(築造美)를 유지한다.
참나무는 대패질도 허락지 않고 못도 받아드리지 않는 견목(堅木)이면서도 목질의 부식은 소나무 보다 빠르다. 참나무는 재목의 자질을 지니지 못 했다. 국보급 궁궐이나 절집은 물론이고 화전민의 너와집도 못 짓는다.
그런데 참나무가 없으면 소나무도 쓸모 없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논 삶는 써레의 몸체는 소나무인데 이빨은 참나무다. 이빨이 단단해야 겨우내 말라붙은 흙덩이를 으깨서 어린 모가 뿌리를 잘 내리도록 곤죽처럼 삶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목화씨를 바르는 씨아도 몸체는 소나무지만 가락은 참나무다. 씨아의 가락은 아래 위 한 쌍이 맞물려 압착(壓着)하는 힘으로 목화씨를 바른다. 그 압착의 축을 이루는 가락의 귀는 당연히 쇠처럼 야문 참나무라야 감당할 수 있다. 소나무는 압착력을 못 견디고 귀때기가 떨어진다.
그렇다고 참나무의 쓰임새가 가혹한 감당이나 하는 데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대접받는 쓰임새도 있다. 그 유명한 평북 박천의 반다지는 참나무로 만든다고 한다. 내당마님의 손길에 반들반들 길들여진 박천반다지가 대갓집 안방 윗목에 화류장롱과 더불어 묵직하게 좌정하고 있다면 그 집의 가세는 요지부동한 것이다. 반다지의 용도가 주로 비단피륙이나 금은보화를 담아 두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한 집안의 가세를 보관하는 가구 재는 당연히 무겁고 견고한 질감의 나무라야 한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참나무의 근본 자질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참나무는 동양에서 보다 서양에서 더 대접받는다. 저 유명한 '보르도 와인'은 반드시 참나무 통에 담는다. 갓 거른 새 술은 탁하고 맛이 없는데 참나무 통에 담아 숙성시키면 비로소 달고 향기로운 '보르도 와인'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왜 그럴까. 목질의 담백성 때문일 것이다. 서양참나무는 맛 좋은 포도주에 푹 젖어 한세월 호강을 누린다.
그 뿐이 아니다. 포도주 안주에 제격인 훈제(燻製)고기는 반드시 참나무 연기를 쏘여서 만든다. 수지(樹脂)가 타는 그을음이 없는 담백한 연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 담백성, 나는 참나무를 좋아한다고 당연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을 알았다. 담백한 연소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참나무의 장점이다. 참나무가 할 수 있는 일을 소나무가 다 할 수 있다고 해도 훈제는 못 만든다. 송진이 타는 그을음 때문이다. 소나무는 탈 때 송진이 지글지글 끓으며 기름지게 타기 때문에 그을음이 나서 훈제를 만드는데는 못 쓴다.
담백한 연소, 그러고 보니 고승의 다비(茶毘) 의식이 연상된다. 사람의 주검들도 태우면 생애의 탐욕 정도 만치 그을음이 더 진하고 덜 진한 차이가 날지 모른다. 채식으로 고행을 하다가 열반에 드신 선승(禪僧)의 주검이 태우면 맑고 담백한 연소를 한다면, 호의호식하던 모리배나 탐관오리의 기름진 주검은 태우면 비계 덩이가 타는 그을음이 충천을 할 것 같다. 참나무가 타는 것은 사리(舍利) 몇 과를 남기고 홀연히 연소하는 선승의 다비와 같다. 참나무 연기래야 우수한 훈제 육을 만드는 이유다.
그러나 참나무의 담백한 연소는 도자기를 굽는데는 쓸모가 없다. 도자기를 굽는데는 소나무장작이라야 한다. 송진이 타는 끈질긴 화력이라야 맑고 깊은 빛깔을 내기 때문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이 천년을 가는 것도 송진 때문이다. 참나무는 소나무처럼 송진이 없다.
사람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너나 없이 소나무만 편애(偏愛)해 온 것은 소나무의 수격 때문이다. 어느 나무를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는 사람들의 취향은 자유다. 나는 참나무의 격의(隔意) 없는 수격이 더 좋다.
봄이면 어린애의 미소처럼 순진무구하게 이파리를 피우는 참나무 숲을 보라, 여름철새들은 다 거기 깃들이어 한 시절의 낭만을 노래한다. 석양에 서 있는 겨울 참나무의 인동(忍冬)을 보라, 한없이 꿋꿋함에 나는 감격한다. 하얗게 눈을 덮고 서 있는 소나무는 오히려 얼마나 따뜻한가. 내가 참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우리의 기상이라고 애국가에서도 예찬을 했다. 소나무가 참나무보다 기품이 높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참나무가 저자거리에 장보러 나온 백성들 같다면 소나무는 정자 위에 앉아서, 또는 탁족(濯足)을 하면서 음풍농월(吟風弄月)하는 선비 같다.
그래서 소나무를 시인들은 예찬하고 묵객들은 그렸다. 소나무는 중국의 신선사상인 십장생(十長生)에도 들었고, 우리나라의 선비정신인 오청(五淸)에도 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李珥의 세한삼우(歲寒三友)중 하나이고, 윤선도의 다섯 벗 중 하나다. 어디 그 뿐이랴, 속리산의 어떤 소나무는 벼슬이 정이품에 올라서 춘추가 600세인 오늘날에도 기력이 조금만 떨어지면 작고하시나 싶어서 보약을 대령하고, 외과적 시술을 하고, 해충이 범접을 못하게 방충망을 씌우는 등 관아에서 구실아치들이 야단법석을 친다.
나는 소나무의 수격이 높은 점을 인정한다. 조금도 소나무의 수격을 폄훼(貶毁)할 의사는 없다. 다만 아무리 소나무의 기품이 높다 하더라도 소나무 단순림(單純林)을 보면 단조롭기 그지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미끈하게 잘 자란 춘양목(春陽木) 우량임지도 사관생도의 열병식장처럼 장엄한 느낌을 줄뿐이다. 하물며 생장이 불량한 중부지방의 송충이가 덤벼든 꾸부정이 소나무 단순림은 열악한 환경에서 저 자신의 이익과 수격을 도모하려는 반목과 질시가 엿보여서, 파당을 일삼는 기강이 해이했던 조선시대 선비들인 소인배(小人輩)의 무리 같을 뿐이다. 그렇다고 참나무 단순림의 모습이 소나무 단순림보다 더 좋아 보인다는 말은 아니다. 참나무 단순림은 가난해서 궁색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숲은 소나무와 참나무가 섞여 있는 혼효림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소나무와 참나무의 혼효림은 우수한 사회상(社會相)같아 보인다. 혼효림은 서로에 의해서 서로의 가치가 드러나 보이는 아름다운 숲이다.
우리 동네 앞산은 참나무가 주종을 이룬 혼효림이다. 소만(小滿)무렵, 툇마루에 걸터앉아서 멍청하게 산을 건너다보면 깜짝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즐겁고 흐뭇한 숲의 모습. 숲의 돈독한 사회상이 나를 감동시키는 것이었다.
남풍이 간단없이 불어 왔다. 바람이 누런 보리밭을 물결 지우며 건너가서 숲을 흔들었다. 숲을 위해서 부는 바람이 아니라 바람은 난 바람이다. 녹음이 우거진 골짜기에 바람이 몸을 뒤섞는다. 참나무 숲이 환하게 웃으며 너울너울 활개춤을 춘다. 음양의 조화 속 같은 질탕한 숲. 이파리를 하얗게 뒤집으며 너울너울 춤을 추는 참나무들의 기탄 없는 춤사위 도대체가 기품을 스스로 도외시한 솔직한 마음일 뿐이다. 참을 수 없는 사내들의 희열이다. 물론 우아한 춤사위는 아니다. 그렇다고 초라니처럼 경망스러운 춤사위도 아니다. 사내들의 기쁨을 유감없이 들어내 보이는 온몸을 다 휘두르는 커다란 춤사위다. 그 때 소나무들의 태도는 어떤가. 고절스럽고 우아한 기품을 지키려고 참나무들의 군무를 외면하고 독야청청 할까, 그러면 숲은 얼마나 이분법적(二分法的) 부조화의 사회성을 들어내 보이 것인가.
그러나 소나무는 참나무들의 군무를 보고 슬쩍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수격 높은 나무답게 '껄-껄-껄---' 웃는 것이 아니고, 소박하고 참을 수 없음을 들어내며 '파-하-'고 노랗게 송홧가루를 날리며 참나무들의 춤판에 흔쾌히 동화한다. 그리고 소나무는 짐짓 굼실굼실 한량무 한 사위를 춤춘다. 참나무들의 신명에 의도적으로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파격이 소나무의 높은 수격을 손상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차원이 다른 수격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고절스럽고 우아한 기품에다 소탈한 일면까지를 보여 주어서 소나무의 사회적 호환성(互換性)이 돋보이는 것이었다.
혼효비율이 75%면 혼효림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수한 숲의 모습은 75%를 참나무가 차지하고 나머지 25%를 소나무가 차지하는 것이 보기 좋은 숲이다. 참나무를 두둔하는 소리가 아니라, 우수한 인자는 적을수록 돋보이는 이치를 소나무에 둔 것이다. 참나무에 의해서 소나무는 더욱 고절스럽고, 참나무는 소나무에 의해서 사회의 저변을 구축하는 다수의 필요성으로 바라보이는 것이다.
오월에 '권금성'에 올라서 훈풍에 춤추는 설악산의 숲을 보던지 아니면 '진고개'를 넘어오다 차를 멈추고 소금강의 산자락을 뒤돌아보면 알 수 있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어떻게 섞여서 아름다운 숲을 이루었는지-. 우리의 백두대간을 이루는 소나무와 참나무, 그 주체성이 돈독한 혼효림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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