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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균 수필 연재 - 고모부

Joyfule 2012. 2. 15. 04:18

 

    

 

목성균 수필 연재 - 고모부

첫추위가 나는지 해가 지면서 바람이 인다. 베란다 창문이 덜컹거린다. 이렇게 풍세가 사나운 날이면 고모부 생각이 난다. 마르고 키가 크신 분이었다. 할머니는 고모부를 출신이 박복해서 당신 딸을 일찍 죽게 했다고 미워하셨다.
눈발이 산란하게 흩날리는 풍세(風勢) 사나운 날이었다. 튀장(土醬) 냄새 가득한 방안에 식구가 다 모여서 저녁밥을 먹고 있었다. 우수수 울타리를 할퀴고 가는 매운 바람 소리와 하등 상관없이, 단 구들과 새로 담은 화로불의 온기로 방안은 그지없이 안락했다. 단란한 밥상머리의 조건은 진수성찬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튀장 냄새 한가지만으로 밥상은 진수성찬이었는데 그 까닭은 식구 중에서 누구도 그 사나운 풍세 속에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럴 때 할머니는 일쑤 조용히 탄성을 지르셨다.
“참 좋다.”

그렇게도 좋으신 지 할머니는 몹시 행복해 보이셨다. 그런 저녁 때 고모부가 오셨다.
뜰 위로 사람이 올라서는 기척이 나더니 “정 서방입니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벌컥 방문을 열어제치셨다. 뜰 위에 키가 껑충하게 큰 초로의 남자가 주르막을 지고 서있었다. 고모부였다. 아버지가 나가서 맞아 들였다.
고모부는 지고 오신 주르막을 마루에 벗어 놓고 방안으로 들어오셨다. 차가운 겨울 외풍이 고모부를 따라 들어와서 튀장 냄새를 몰아 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고모부가 할머니께 큰절을 했다. 고모부는 환갑잔치를 치르고 당신 장모께 인사를 오신 것이다. 할머니는 고모부의 손을 잡고 “마누라가 있나, 장성한 자식이 있나 어찌 환갑을 해 먹었는고-.” 하시며 눈물을 비치셨다. 할머니는 고모부께 두루마기를 벗으라고 이르셨다. 고모부에 대한 할머니의 미움이 연민으로 변하신 듯 했다.

고모부가 두루마기를 벗자 할머니는 두루마기를 둘둘 말아서 어머니께 밀어 놓으며 빨라고 이르셨다. 고모부가 환갑 때 입은 두루마기라며 아직 빨 때가 안되었다고 사양했으나 동정이 까만데 무슨 소리냐며 할머니가 윽박지르셨다.
두루마기를 빨아 말려 가지고, 또 풀을 먹여 말려서 다림질을 하는 푸새빨래 과정은, 엷은 겨울 햇살아래서는 좋이 이삼일은 걸려야 한다. 할머니가 고모부의 두루마기를 빨게 하신 것은 고모부를 그동안 잡아두시려는 심산이셨을 것이다.
고모부가 어머니께 주르막에 술과 안주가 있으니 상을 보아달라고 하셨다. 고모부 말씀에 어머니가 밖으로 나가셨다. 나도 어머니를 따라 나갔다. 툇마루는 한겨울이었다. 고모부가 지고 오신 주르막을 열자 안에는 한지에 싼 돼지 다리 하나와 용수 질러 뜬 맑은 술이 한 병 들어있었다. 돼지 다리는 앞다리인지 뒷다리인지는 기억에 분명하지 안지만 여하튼 작았다. “아이구, 돼지 다리가 작기도 하다.” 어머니가 한지(韓紙)를 풀어 헤치고 하신 말씀이다. “원-, 하얗기도-. 새로 뜬 문종인가, 눈 같이 희네.” 하시며 한지를 본견(本絹) 바닥 쓸어보듯 만져보셨다. 딸을 데려다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환갑을 맞은 사위가 장모님께 할 수 있는 죄송한 마음의 표시를 다하고자한 마음이 역력하였다. 한지 복판은 돼지기름이 촉촉이 배어있었으나 네 귀퉁이는 새벽 눈밭처럼 희었다.

“불쌍한 고모부-.”
어머니가 한숨처럼 조용히 하시던 말이 생각난다.
고모부는 고모가 돌아가시고 새장가를 들었는데 움 고모가 가버리고 홀로 환갑을 맞으셨다. 내 고종 누이는 과년이었고, 고종 남동생은 어렸다. 환갑이란 부모가 모은 재산을 가지고 자식이 낯을 내는 잔치라고 한다. 그러나 성혼도 못시킨 자식들이다. 고모부는 자신의 환갑잔치를 자신이 치르신 것이다. 그건 잔치가 아니라 관례를 치른 것뿐이다. 물론 아버지가 매형의 환갑잔치를 주관하다시피 보고 오시기는 했을 터이지만 고모부의 실정으로는 착잡한 환갑잔치였을 시 분명하다.

내가 고모부를 보인 것은 열 대여섯 적 그 때가 마지막이다. 고모부는 환갑잔치를 하고 얼마 안 되어 돌아가신 듯하다. 가끔 겨울 저녁바람에 두루마기 자락을 흩날리며 외로이 가는 사람의 먼 모습을 보면 고모부 아닌가하고 서서 지켜보곤 했었다.
고모부 댁은 우리 집에서 육 십리쯤 떨어져 있는 강 마을이었다. 차를 타고 오려면 괴산 읍내까지 사십여 리를 걸어나와서 하루 한두 번 밖에 다니지 않는 버스를 타고 연풍 읍내까지 와서 다시 십리 길을 걸어 와야한다. 필경 고모부는 그리 구차스럽게 차를 타고 오지 않고 걸어 오셨을 것이 분명하다. 걸어오셨다면 그 길은 강바람에 마른 갈대가 서걱서걱 아픈 소리를 내고 모래가 날리는 강변 길을 지나서, 나룻배로 강을 건너서, 다랑논이 비늘처럼 늘어붙은 산골짜기를 지나서, 동네 뒤 지금티 재를 넘어와야 하는 하룻길이다. 주르막에 부모 염습하듯 한지로 공손하게 싼 작은 돼지 다리 하나와 술 한 병을 담아 지고서 하루종일 걸어오시며 고모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삶을 달관하기에는 현실이 각박하신 어른의 노정이 얼마나 멀고 추웠을까, 나는 고모부가 불쌍하다고 한 어머니의 말이 무슨 뜻인지 두고두고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나도 동네 환갑잔치 집 과방 일을 보아서 알지만, 고모부가 환갑을 맞으신 그 때 돼지 다리 하나를 과방에 내놓지 않고 간수하려면 잔칫집 안주인이 굳세게 버티지 않고는 어렵다. 잔치집 안주인은 먼데서 오신 일가친척 손님들이 돌아가실 때 봉송을 쌀 걱정에 돼지 다리를 하나쯤은 빼 돌려놓게 상례다. 과방에서는 조치개 접시 담을 돼지고기가 떨어지면 그 걸 노린다. 그래서 과방쟁이와 잔치집 안주인은 잔치 막판에 다투기 일쑤다. 돼지다리를 놓고 공방을 벌리는 것이다. 그 건 잔치집 안주인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바깥주인은 잔치의 본질(本質) 때문에 체신 없이 그러지도 못한다. 그런데 고모부는 어떻게 그 작은 돼지 다리를 끝까지 지켜서 장모님께 갔다드렸을까, 고모부께서 구태여 버겁게 이행하신 사람의 도리가 나를 오늘 날 까지 슬프게 한다.

따뜻한 방안에 앉아서 방밖의 눈보라치는 소리를 듣는 게 행복하다는 것을 모르면 죄 된다. 행복은 사람만 안다. 짐승은 모른다. 사람 중에서도 아이들은 모른다. 어른들만 안다. 불행을 아는 만치 행복을 아는 것이라는, 즉 삶의 각고(刻苦)가 누적된 것 만치 행복도 누적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모부는 풍세 사나운 날 하루 종일 걸어 와서 당신 장모이신 우리 할머니에게 큰절을 올리고 튀장 냄새 가득한 아늑한 방안에 앉아서 행복하셨을까? 방밖의 찬바람소리를 들으며 그 점이 궁금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