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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균 수필 연재 - 국화

Joyfule 2011. 12. 14. 13:54

 

    

 

목성균 수필 연재 - 국화 
 

어머니가 심으신 국화 두 폭이 소설(小雪)이 지나자 마침내 시들었다. 청초한 꽃송이를 담뿍 피워 스산한 초겨울 마당을 화사하게 밝혀 주던 국화였다.
아버지는 중풍이 들어 계신다. 발이 네 개 달린 환자용 알루미늄 지팡이를 짚으셔야 겨우 마당에 나가 보실 수 있다. 뜰이 한 길, 마루가 한 길, 덜렁하게 높은 한옥에서는 누가 업어 내려 드리기 전에는 방에서 꼼짝을 못하셨다. 그래서 아버지 혼자 마당에 드나들 수 있도록 동선(銅線) 높이를 없앤 조립식 주택으로 개축을 하고, 마당에는 혹시 아버지가 넘어져도 다치지 않게 잔디를 심었다.

 

“원, 마당을 풀밭을 만들다니, 집안이 망조가 드는구나.”
어머니는 마당을 잔디밭으로 만드는 걸 몹시 섭섭하게 여기시는 눈치였다. 왜 안 그러시겠는가. 차일을 치고 잔치도 하고, 가을 마당질도 하고, 베매기도 하고, 달빛 아래 멍석을 깔고 가족이 단란하게 모여앉아서 모깃불을 피웠었다. 우리 집안 삶의 내력이 낭자한 마당이다. 그 마당이 풀밭이 된다는 것은 어머니에게는 가세(家勢)의 영락으로 보이셨을 것이다. 하기는 집안의 대주(大主)가 수족을 접었으니 가세가 기운 것인지도 모른다. 대주는 가고 또 새 대주가 서는 게 세월의 순리라 하더라도, 문제는 새 대주의 삶이 목표에 대한 열성과 노력이 가세를 좌우하는 것이니 만큼 자식이 아버지만 못하면 기우는 가세이긴 하다. 안방에는 커다랗게 동창을 달았다. 아버지는 그 창가에 안락의자를 놓고 앉아서 창문 너머로 앞산

 

유지봉을 하루 종일 바라보며 지내셨다. 지팡이의 손잡이에 턱을 괴고 우두커니 유지봉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권태를 보면 인생무상이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다.

유지봉은 아버지가 한평생을 바라보신 산이다. 높이가 7백 미터쯤 되는 정삼각형의 산으로 소나무와 잡목이 뒤덮여 있다. 마을의 당산이다. 그 산 칠부 능선쯤 서낭나무가 있어서 정월이면 동고사(洞告祀)를 지낸다. 산 중복부 이하 비알은 묵은 뙈기밭들인데, 어느 밭은 낙엽송을 심어 우거졌고 어느 밭은 그대로 묵어서 어린 나무들과 칡넝쿨이 우거져 있다. 그 묵은 따비밭들이 다 경작될 때 아버지의 생애도 절정기였다.
우리는 유지봉에 따비밭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는 그 따비밭으로 이루는 마을의 삶에 애착을 가지고 솔선수범 하셨다. 가을 달밤에 울력을 하러 앞장서서 밭에 올라가시기도 했고, 따비밭 작인 뉘 집에 애를 낳으면 내 자식처럼 이름을 지어서 출생신고를 해주셨고, 애경사에는 나서서 호상(護喪)도 보고 상객(上客)도 따라가셨다. 아버지는 지팡이 손잡이에 턱을 괴고 유지봉을 바라보시며 어제 같은 그 시절을 생각하실 것이다. 어제 한 생각 오늘 또 하고, 그리고 내일 또 하고, 남은 여생을 아버지는 당신이 장만하신 토지 문서를 뒤적이듯 그때의 추억을 반추하며 사시는 것이다.

 

산은 사계절의 변화를 보여 주는 것은 물론이고 하루도해 기울기에 따라서 산색도 변했다. 유지봉은 아버지의 유일한 동무였다. 그런데 산은 가을이 깊어지자 아버지의 응시(凝視)에도 불구하고 나날이 인동(忍冬)의 정신만 고양하며 저대로 적막해 갔다. 그때 마당가에 두 그루의 국화가 곱게 꽃을 피워서 아버지의 침울을 밝혀 주었다.
나는 마당의 잔디에 배전의 정성을 들였다. 잡초는 눈에 뜨이는 대로 뽑고, 가물면 물을 주고, 잔디가 조금 자라면 깎아 주었다. 그런 내 정성을 잡초가 무시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나는 잔디밭에 돋아난 잡초를 보면 발끈하는 성미를 드러내며 당장에 뽑아 버렸다.

 

그런데 어느 봄날, 며칠간 청주에 다녀와 보니 아버지의 방 창문 앞 잔디밭에 한 자쯤 간격을 두고 쑥부쟁이 두 폭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지 않은가! 나는 발끈해서 뽑아 버리려고 보니 그건 쑥부쟁이가 아니고 국화 꽃묘였다. 어머니가 이웃집 새댁한테서 얻어다 심었다고 하셨다. 하필 아버지가 운동을 하시는 발치에 국화를 심어 놓으실 게 뭐람. 마뜩찮아서 담 밑으로 옮겨 심으려고 했더니 어머니가 말리셨다.
“얘야, 내버려 둬라. 일부러 창문 앞에 심었다. 늦가을에 꽃이 피면 추워서 밖에도 못 나올 너의 아버지한테 좋은 동무가 될 거다.”
그래서 국화 두 그루가 아버지의 창문 앞 잔디밭을 차지하고 자라게 된 것이다.

 

차가운 별빛 아래 풀벌레의 애조마저 뚝 끊어지고 서리가 하얗게 내리며 가을이 깊어지자 국화가 시절을 만난 듯 탐스러운 꽃을 피웠다. 하나는 황국, 하나는 자국이었다. 한 쌍이 마주보고 서 있는 모습이 마치 가을날 초례청에 서 있는 신랑 각시처럼 청초하고 아름다워서 집안이 경사스러웠다. 국화꽃은 소설 무렵까지 내내 피어서 아버지의 창을 우수로부터 막아 주었다. 팔십 노모가 병객이신 당신 영감님의 적막한 만추를 유념하여 국화를 심으신 것이다. 내가 태어난 속을 자식인 나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 병객의 자식들이 생각지 못한 일을 병객의 늙은 아내가 생각하셨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소싯적부터 금실이 좋지 않으셨다. 그 좋은 한 예가 있다. 아직 두 분이 젊었을 때 아버지의 생신날이었다. 아버지는 안방 아랫목에 점잖게 앉아 계셨다. 생일상을 받을 자세였다. 그런데 그날따라 아버지의 밥상은 살 한 톨 섞이지 않은,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노란 조밥을 미역국도 없이 차려 드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생신인 줄 아시면서 고의적으로 그러신 것이다. 아버지는 평생을 장터거리로 나가 사셨다. 오다가다 더러 시앗도 보아 가면서-.
“오는 내 생일 아녀?”
“무슨 대단한 탄생을 했다고 생일 타령이여.”
밥상이 윗목에 앉아 있는 어머니 치마폭에 날아와서 떨어졌다. 아버지는 방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나가시고 어머니는 넋두리를 하고 우셨다.
“어디 한번이라도 맘에 드는 짓을 한 적이 있어야지 미역국을 끓여주지. 귀는 부처만 해가 지고 하는 짓은 파계승만도 못한 주제에 생일은 어래 아네.”
실컷 울고 나신 어머니는 속이 시원하다고 하셨다. 아버지에 대한 오죽한 어머니의 억하심정이었으랴. 한 쌍의 국화꽃이, 그런 두 분의 금실이 마침내 해후하는 생애의 대단원처럼 나이 든 자식을 감동시키는 것이었다. 다 사그라진 어머님의 마음속에 웬 새댁 같은 마음의 불씨가 남아 가지고 자식의 불효를 이렇듯 부끄럽게 하시는지, 다 지나간 한평생일 뿐, 미움은 봄눈 녹듯 사라지고 그저 연민만 남으셨나보다. 

 

아버지는 창 곁의 의자에 앉아서 지팡이 손잡이에 턱을 괴고 을씨년스러운 만추의 산을 건너다보다가 국화꽃을 바라보곤 하셨다. 저 국화마저 없었으면 아버지의 적막이 얼마나 깊었을까 생각하면 부부의 해로(偕老)가 보이는 것이었다.
동란과 궁핍과 혁명, ‘잘살아 보세’의 열망 등의 한 시대를 살고 조만간 사라질 파란만장한 범부(凡夫)의 을씨년스러운 눈앞에 국화 두 그루를 놓아 준 반려자의 불씨 같은 애틋함이여! 자식인 나는 그 생각을 못했으니 ‘효자 열이 악처 하나만 못하다’는 옛 속담이 그르지 않다.

 

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시면 창가에 앉아서 하얗게 서리 내린 창문 앞에 서서 청초하게 웃음 지으며 ‘영감님, 밤새 안녕하셨어요’ 하는 국화꽃의 문안인사를 받으신다. 그러면 긴긴 가을밤을 병고로 뒤척인 흐린 눈에 반짝 생기가 도시는 것이었다.
국화는 창 곁에 앉아 있는 아프고 고독한 노인에게 온종일 무슨 이야기인지 오근자근 들려주는 듯했고, 노인은 ‘암, 암’ 하면서 듣는 듯한 얼굴이셨다. 아버지는 그 국화로 해서 생명에 대한 애착을 느끼시는 듯, 그 늦가을의 우수에도 불구하고 병은 더 나빠지지 않으셨다.

 

황국과 자국, 색조가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었다. 그 국화 한 쌍은, 낮에 보면 잠시 일손을 놓고 햇빛 바른 가을 들녘에 마주서서 잠시 눈을 맞추는 젊은 농부 내외 간 같아 보였고, 밤에 보면 망건을 졸라매고 단정히 앉아서 책을 읽는 서방님과 그 곁에 앉아서 한 땀 한 땀 수를 놓으며 독경에 귀기울이는 그의 아내 같아 보였다. 문득 어머니께서 평생을 그리던 당신의 꿈이 바로 저런 거였어 하고 아버지께 보여 드리느라고 일부러 아버지의 창 앞에다 국화 한 쌍을 심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흩어진 옷매무새로 무심히 마당에 나갔다가 된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은 청초하고 단아한 국화를 보면 내 부족한 효심이 부끄럽기도 할뿐더러, 아버지의 다정한 친구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얼른 옷매무새를 바로잡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