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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균 수필 연재 - 소나기

Joyfule 2011. 12. 13. 14:24

 

 

   

 

목성균 수필 연재 - 소나기


윗버들미의 소나기는 건넌골 쪽에서 들어온다.
숨가쁜 삼복지경, 작열하는 불볕 아래 엎드려서 곡식을 가꾸는 농부들은 가혹한 삶의 비등점(沸騰點)에서 묵비권을 행사하며 인내한다.

 “참는 데도 한계가 있어.” 그 말은 참을성이 모자라는 사람이 하는 소리일 뿐, 여름 농부에게는 가당찮은 말이다. 여름 농부의 참을성은 끝이 없다. 농부의 참을성은 곧 삶 자체인 것이다. 저문 밭고랑에서 허릴 펴며 돌아볼 때 자신이 온종일 지나온 깨끗한 밭두둑에 서 있는 곡식의 싹수 있음이 참을성의 원인이긴 하다.


복지경의 소나기 한 줄기는 농부의 한계체온 이상의 무모한 인내에 대해서 여름날이 줄항복을 하는 것이다. 삼굿 같던 날씨가 제풀에 겁을 먹고 ‘독한 놈. 이러다 사람 잡지. 내가 졌다.’ 하듯 난데없는 시원한 바람 한 점을 백기처럼 흔들며 들판을 훑고 가버린다.

돌연한 날씨의 변덕에 농부들은 본능적으로 밭고랑에서 놀란 장끼 고개 쳐들 듯이 벌떡 일어나 건넌골 쪽을 쳐다본다.

아니나 다를까 컴컴한 골 안에서부터 막잠 자고 난 누에 뽕잎 먹는 소리처럼 버석거리며 뽀얗게 묻어 드는 소나기가 미처 피해 볼 새도 없이 순식간에 들판을 유린해 버린다.

유린! 그 얼마나 협쾌한 유린인가. 수절과부가 외딴 골짜기에서 범강장달이 같은 사내에게 겁탈을 당한들 그만큼 협쾌할까. 소나기는 탈수증세로 축 늘어진 모든 생명을 가차없이 ‘일어나라, 깨어나라’ 하듯 회초리로 휘갈기며 지나간다.

척후가 지나가고 주력이 뒤따르고, 숨 돌릴 새 없이 골짜기를 파죽지세로 유린한다. 그러면 삼복염천에 전의를 잃고 축 늘어져 있던 모든 생명들이 시퍼렇게 너풀너풀 일어서는 것이다. 동학군 같은 기세로.


그런데 그 소나기를 피해서 노루 제 방귀에 놀라서 내뛰듯 냅다 뛰는 경망스러운 농부도 더러 있다. 대개 참을성이 없는 선머슴인데 그래 봤자 몇 발짝 뛰기 전에 옷이 흠뻑 젖고 만다. 중과부적인 사세 판단도 못하고 무모한 짓을 한 범연(泛然)치 못한 농부는 흠뻑 젖어 가지고서야 짓쩍은 듯 걸음을 멈추고 누가 보지 않았나 싶어서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면 눈에 들어오는 질펀한 논바닥의 백로 한 마리,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소나기 속을 성큼성큼 걷는 모습이 하얀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길 나선 유생(儒生)처럼 행보가 점잖다.


소나기에 사로잡혀 걸음을 멈춘 농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쏟아붓는 세찬 빗줄기가 얼굴을 따하게 때린다.
청량감-. 찌는 더위를 인내하던 고갈(枯渴) 같은 안면이 금방 새벽에 핀 호박꽃처럼 환해진다. ‘어 시원하다.’ 그리고 비로소 논바닥의 백로를 본떠서 진중하게 걸어간다. 늦었지만 잘 생각한 것이다. 흠뻑 젖은 꼴에 촐랑이처럼만 뛰면 개만도 못하다.

소나기를 맞으며 돌아오는 우리 수캐를 본 적이 있다. 타동(他洞)에 암캐를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리라. 뛰는 것도 아니고 걷는 것도 아닌 한결같은 걸음으로 들을 건너 마을로 드는 수캐의 거동이 타동 암캐를 보러 갔다오는 수캐답게 의젓하다.

집에 들어와서 젖은 몸을 부르르 털고 뜰에 너부죽이 엎드려서 눈을 가늘게 뜨고 비 묻은 앞산을 건너본다. 소나기는 개장국의 운명 앞에 처한 복지경의 개까지도 그렇게 달관적으로 만든다.


소나기가 오면 동네가 다 행복하다.
세찬 소나기가 골짜기를 무자비하게 유린하는 동안, 날은 저무는 것처럼 어둑해진다. 그 어둑한 저기압을 타고 고샅으로 퍼져나가는 기름질 냄새. ‘나 예쁘지-’ 하고 울타리에 매달려 있는 청순한 애호박을 ‘그래, 너 예쁘다’며 똑 따다가 채를 썰어 햇밀가루에 버무려 부침개를 부치는 냄새다.

그 냄새가 집집마다 풍겨 나와서 고샅에 범람을 한다.

젖은 옷을 벗어서 추녀 밑에 널고 보송보송한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 물끄러미 낙숫물 지는 걸 보며 기름질 냄새를 맡으면 드높았던 삶의 집착이 한없이 해이해지면서 기분 좋은 졸음이 엄습한다. 뜨락의 수캐는 그새 잠들었다. 소나기는 개와 사람을 축생과 인생이 다 중생일 뿐이라는 불계의 실정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할머니와 같이 조밭을 매다가 소나기를 만난 적이 있다. ‘후드득’ 주먹 같은 빗방울이 듣는데 할머니는 계속 밭을 매셨다. 공연히 몸이 달아서 햇꿩처럼 벌떡 일어서는 내게 할머니는 “어서 가거라, 비 맞기 전에” 하셨다. 그리고 한 점의 동요도 없이 계속 밭을 매셨다.

비 맞는다고 어서 가라시는 할머니의 말씀은 공연한 빈말이었을 것이다. 기실 속으로는 ‘이놈아, 삼복염천에 달군 몸을 소나기에 식혀 보아야 농사짓는 맛을 아는 겨’ 하셨을지 모른다. 그예 ‘쏴-’ 하고 쏟아지는 소나기를 노박이로 맞고서야 할머니는 밭고랑에서 일어나셨다. 그러고도 밭담울을 뒤덮은 호박넝쿨을 뒤져서 애호박을 몇 개 따서 다래기에 담아 가지고 밭둑으로 나오셨다.


삼베 치마적삼이 소나기에 흠씻 젖어서 몸에 착 달라붙었다. 할머니의 몸은 한줌밖에 안 되었다. ‘세상에!’ 할머니의 체신이 그밖에 안 되는 줄을 나는 처음 알았다. 할머니의 저 몸 어디에서 끝없는 노동력이 누에 실 게워 내듯 줄줄이 이어져 나오는 것일까. 지칠 줄 모르는 할머니의 노동력은 사랑이었다.

일가(一家)의 복리 증진을 위한 헌신이었다. 할머니의 노동력은 우리 집안의 살림살이를 위한 불가피한 생산수단이긴 하지만 경제적 가치로 논할 수는 없다. 지고지순한 사랑일 뿐이다.


할머니의 지칠 줄 모르는 노동력은 휴머니즘의 견해인 ‘인간이 인간을 한없이 초월한 경우’라고 존중만 하면 되는 것인지, 스무 살 적 나는 할머니와 같이 소나기 속으로 들길을 걸어오면서 많이 혼란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 제게 업히세요’ 하는 일종의 감상이었는데 그것은 할머니의 삶을 가벼이 여긴 얕은 소견으로, 나는 결코 소나기에 젖은 할머니의 삶의 무게를 업을 힘을 지니지 못했다.


걸레처럼 구중중한 할머니의 삼베 치마적삼이 널린 추녀 밑이 훤해지면서 천둥소리가 산을 넘어갈 때, 어머니가 부침개 접시와 막걸리 한 대접이 놓인 소반을 안방에 들여놓았다.

할머니는 막걸리 대접을 단숨에 비우시고 적을 손으로 뜯어서 입에 넣고 씹으시며 “참 맛있다” 하셨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처음 먹어보는 사람처럼 감탄을 하신 그 맛이 어찌 미각으로만 느낄 수 있는 맛이랴. 소나기가 우리 할머니를 가차없이 유린한 것은 그 맛을 주기 위해서였다.

고마운 소나기-.
천둥소리는 아주 멀리서 울려오고 낙숫물이 그치는 추녀 밑으로 앞산에 무지개가 떴다. 소나기는 내게 무지개보다 더 곱고 아름다운 삶의 실정을 가르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