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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균 수필 연재 - 알밤 빠지는 소리

Joyfule 2011. 12. 16. 13:30

 

   

 

목성균 수필 연재 - 알밤 빠지는 소리

 

 

우리 집 뒤꼍에 추석 무렵 아람이 버는 올밤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알밤 빠지는 소리는 작다. 마음이 조용히 머물러 있어야 들린다. 그래서 마음이 분방한 철없는 시절에는 못 듣는다. 할머니 말마따나 철이 나야 들린다. 어느 가을날 마루에 걸터앉아서 파랗게 깊어진 하늘을 발견하고 “아-, 가을이구나” 하고 숨을 죽이는데 그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감동해서 알밤이 빠진다고 소릴 질렀다. 할머니가 알밤 빠지는 소리가 들리느냐고 하시며 퍽 대견해하시는 어조로 “철났네” 하셨다.

 

고향 생각 중에는 알밤 빠지는 소리가 차지하는 자리는 확고하다. 마지막 태풍이 지나가고 청명한 하늘이 열린 어느 날, 문득 불쾌지수가 걷힌 상큼한 바람 한 점이 폭염에 지친 거칠고 야윈 볼을 스치며 그 삽상하고 청량한 소리가 도시의 소음 속에서도 내 가슴으로 떨어져 오는 것이다.

 

내 고향집은 동향이라 아침 햇살이 참 좋았다. 초가을날 아침해가 앞산 위로 불끈 치솟으면 햇살이 해일처럼 안방에 가득 찼다. 그러면 추석을 쇠려고 새로 바른 눈같이 흰 문 창호지가 장구 틀에 메운 새 가죽처럼 팽팽해졌다. 아침밥을 잦힌 온기로 방안은 따뜻하고 추석 두부를 한 바지를 띄우는 쿨키한 냄새가 방안에 가득했다.

가끔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기명(器皿) 소리가 들릴 뿐 더없이 조용하고 평온한 가을 아침. 나는 눈을 감고 눈까풀에 내려앉는 햇살의 간지러움에 온몸을 맡기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목화송이를 매만지고 계셨을 것이다. 그때 알밤 빠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의 청량감을 나는 잊을 수 없다.
“툭-, 투-투-투-.”
처음 ‘툭-’ 하는 소리는 지극히 삽상하고 리드미컬하다. 첫소리는 밤송이에서 빠진 알밤이 처음 이파리에 부딪치는 소리고 이어서 들리는 소리는 이파리들을 훌치며 떨어지는 소리다. 알밤이 빠지는 소리는 처음 메운 장구를 조심스럽게 쳐 본 소리처럼 새로 바른 팽팽한 방문 창호지에 공명했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가을 새벽 공기를 가르면서 떨어지는 작은 중량의 가속음(加速音)이 의외로 내 마음을 크게 울렸다. 체적에 비해서 큰 데시벨의 알밤 빠지는 소리는 좀 당돌하고 교만스럽다는 느낌을 주었으나 불쾌하지는 않았다. 실과라면 당연히 낼 소리로 받아들여졌다. 소리에 대한 내 마음의 수용력은 설익은 마음이 비로소 익어서 아람이 번 때문일지 모른다.

 

알밤 빠지는 소리는 여운이 깊다. 집에 아무도 없는 가을 한나절 나는 툇마루에 앉아서 알밤 빠지는 소리를 들어보았는데 그것은 내가 경험해 본 평안 중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었다. 알밤 빠지는 소리가 뚝 떨어지고 나면 가을은 한층 깊고 조용해졌다.
“툭-, 투-투-투-.”
그 소리를 듣고 밤나무 밑에 가면 참기름을 바른 것처럼 윤기가 도는 갈색 각질의 열매가 깨끗이 풀을 베어 놓은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알밤이었다. 그 무게를 집어들면 소년의 순수한 탐욕이 손끝에서 바르르 떨렸다.
아버지는 아람이 벌 무렵 밤나무 밑의 풀숲을 산소 벌초하듯 깨끗이 베었다. 그건 비단 알밤을 줍기 위한 일로만 여길 게 아니었다. 타작을 하려면 전날 타작마당을 정성스럽게 쓴다. 그게 농부의 마음인데 밤나무 밑을 알밤 빠지기 전에 깨끗이 베는 마음도 그와 같은 것으로 소망을 마무리하는 농부의 예절이라고 할 수 있다. 밤나무 밑의 풀숲을 깨끗이 베고 허리를 펴시던 아버지가 마침 떨어지는 알밤 소리를 들었다면 마음이 얼마나 충만하셨을까.

 

알밤 빠지는 소리를 제일 먼저 듣는 분은 물론 할머니였다. 어느 날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어미야, 이제 밥을 땅 솥에 하지말고 부뚜막에 걸린 옹솥에다 하거라” 하시면 알밤 빠지는 소리를 들으셨거나 조만간 들으실 예감을 하신 것이다. “알밤 빠질 때가 되었나 보다, 구들의 냉기가 시린 걸 보니” 하시던 할머니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어서 안다.

 

어머니도 여름내 비웠던 아궁이에 불을 지피시며 알밤 빠지는 소리를 듣는다고 하셨다. 그러셨을 것이다. 여름내 비워 두었던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은 수월한 일은 아니다. 눅눅한 아궁이는 잠 트집하는 갓난아기 어미 젖꼭지 뱉어내듯 불길을 내뱉고 빨아들이지를 않는다. 어머니가 갓난아기 달래듯 콧물 눈물을 흘리시며 아궁이를 들여다보고 불을 불어서 아궁이가 달래져야 비로소 불길은 불목을 넘어간다. 그러면 컴컴하던 아궁이가 환해지고 차가운 새벽공기에 언 어머니의 앞가슴이 따뜻하게 더워진다. 그때 한세월의 만감이 눈 녹듯 스러지고 하얗게 빈 어머니 마음을 알밤 빠지는 소리가 ‘툭-’ 치고 ‘투-투-투-’ 울리며 앞치마 안에 떨어졌으리라.

 

할머니는 새벽에 알밤을 주우러 가는 내게 꼭 그리 당부하셨다.
“알밤을 주우러 온 애들이 있어도 다투지 마라. 우리 햇밤으로 제 상을 차리는 집이 있으면 우리 공덕이 되느니라. 알밤을 줍거든 반드시 고맙게 여기고-.”
알밤을 손에 들면 느껴지던 그 무게의 올 참이 나이 들수록 할머니의 말씀과 더불어 새롭다. 이제 내 인생도 아람이 벌어서 ‘툭-, 투-투-투-’ 하고 소리를 내며 올 찬 알밤 하나쯤은 떨어뜨릴 때가 되었건만 나는 쭉정이만 달고 있을 뿐 우리 할머니 말마따나 누가 주워들고 고맙게 여길 만한 열매를 하나도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다. 파란 가을하늘로 뻗은 가지 끝에 오롯이 매달린 부실(不實)들, 찬란했던 봄꽃의 열망에 부응하지 못한, 만유인력도 못 미치는 가벼운 쭉정이를 달고 나는 아주 계면쩍게 당당한 낙과의 계절 어귀에 서서 알밤 빠지는 소리에 감동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