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목성균 수필 연재 - 새벽의 거리

Joyfule 2011. 12. 8. 09:09

 

 

   

 

목성균 수필 연재 - 새벽의 거리


봄이 되면서 경운기 소리에 잠이 깼다.
새벽 안개 속에서 들려 오던 고향의 경운기 소리는 리드미컬한 게 전원적이었는데, 도시의 새벽을 가로질러 가는 경운기 소리는 이질적인 소음이었다. 같은 소리라도 환경에 따라 다르다.


어느 날 새벽, 나는 그 경운기를 보기 위해서 집 앞에 나가 서 있었다. 도대체 무엇 하러 가는 경운기가 신새벽 거리를 진주군(進駐軍)의 전차처럼 오만무례한 소리를 내면서 통과하는지 보고 싶었다.
기상 나팔을 불기 직전의 적적한 긴장이 감도는 병영 같은 새벽 도시 일각을 고압나트륨 가로등이 초병처럼 조용히 지키고 서 있었다. 밤을 지새우고 새벽에 이른 가로등의 호박꽃 같은 불빛, 눈부시지 않으면서 조도(照度)가 분명한 발광(發光)의 성실성, 도시의 편안한 밤을 위해서 철야를 한 가로등이다. 그래도 피곤한 기색이 없다.


어제 저녁, 구미호(九尾狐)의 요염한 눈빛 같은 ‘네온사인’들이 IMF의 불가피한 내핍까지 사냥하려고 집요하게 번득일 때, 저 가로등은 급여가 줄었거나 또는 퇴출 위기에 처한 우울한 도시 봉급자의 귀가를 보호해 주었다. 마침내 자정이 넘으면 ‘네온사인’은 배를 채운 포식자처럼 눈을 감지만, 가로등은 야망의 거리에 휴지처럼 버려진 부도덕과 아쉬움들은 잠재우고 도시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서 긴밤을 지새웠다.


가로등은 공평하고 관대하다. 게걸대며 가로등 아래서 오줌을 질질거리는 취객, 배가 터질 것 같은 관급 쓰레기 봉투를 파헤치는 방견(放犬), 가로등에게 직업적인 혐오감을 하얗게 드러내 보이는 도둑놈에 이르기까지 가로등은 공평하게 후덕한 불빛을 밝혀 주었을 뿐 아니라, 그 부도덕 자체도 극비에 부치고 침묵했다.

가로등은 어둠을 밝히는 객관적인 소임에만 충실할 뿐, 불빛 아래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일체 개입하지 않았다. 그 점이 가로등의 단점인 동시에 장점이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탈탈거리는 소리가 다가오더니 낡은 경운기 한 대가 가로등 불빛 아래 나타났다. 경운기의 짐칸에는 총각무가 소복하게 실려 있고 운전대에는 초로의 농부 내외가 앉아 있었다. 농부는 무표정하게 앞만 바라보고 경운기를 몰고 갔다. 헐렁한 잠바때기를 걸친 구부린 등허리가 나무 등걸처럼 꿋꿋했다.


육거리 새벽시장에 총각무를 팔러 가는 근교 농부 내외일 것이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그때까지 몇 마디나 말을 했을까. 한 마디도 안 했을지도 모른다. 어두운 들에서 손에 익은 자기 일을 순서대로 묵묵히 진행했을 농부 내외의 광경이 눈에 선하다. 나란히 경운기에 앉아 가로등 불빛 밑을 지나가는 침묵에 호감이 느껴졌다.


황토가 묻은 총각무단은 허술하고 촌스러웠으나 그만큼 더 싱싱해 보였다. 열무에 묻은 흙은 일부러 씻지 않았을까. 유기농법으로 생산한 무공해 농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농부의 서투른 상술일까. 여하튼 깨끗하게 씻은 것보다 더 청정채소다워 보였다.

경운기가 지나가고 나자 50cc 오토바이들이 등장했다. 소음기를 달아서 탈탈거리지는 않고 붕붕거린다. 경운기보다는 도시적인 소리다. 아침신문을 배달하는 여러 신문 지국의 오토바이들이다. 한 발짝이라도 앞서서 신문을 배달하려는 선의의 경쟁, 그것은 민완기자들의 취재경쟁에 못지 않다. 저 신문배달부들이 고의적으로 배달을 늦춘다면 민완기자의 특종도, 대기자의 논설도 빛을 잃고 만다.


인사해서 뺨 맞는 법 없다지만 인사는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마음의 표시다. 새벽에 조깅을 하는 건장한 사람에게 ‘수고한다’ 고 인사를 하면 그는 희롱당한 줄 알기 쉽다. 그의 수고는 사회적인 것이 아니고 자신의 건강을 관리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 사람은 수고한다는 인사를 받을 이유가 없을뿐더러 인사를 받을 준비도 하지 않았다. 거기다 대고 굴비같이 건강이 부실한 사람이 ‘수고하십니다.’ 하면, 그 사람은 드러내지 않을 뿐 ‘남이야, 수고를 하든 말든 별 참견이야’ 하고 불편하게 여길지 모른다. 그

런 사람에게 아침 인사를 하고 싶으면 ‘안녕하십니까?’ 하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 싶으면 또 ‘안녕하니까 조깅을 하지’ 하고 불쾌하게 여길지 몰라서 그도 꺼림칙하다. 아침 인사 한 마디를 건네기조차 마땅찮은 사람과는 새벽에 안 마주치는 게 상수다.


정작 새벽에 수고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신문배달부, 미화원, 마지막 순찰을 도는 당직 경찰관 등 그런 사람들에게 ‘ 수고한다’ 고 인사를 하면 ‘네, 안녕하세요’ 하고 황송한 듯 답례를 하다. 그건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것만치나 이문 남는 인사다.


마침내 미명이 도시를 열면, 출발점으로 달려가는 빈 시내버스, 드르륵 하고 열리는 슈퍼의 셔터, 헛기침을 하면서 공장의 출근버스를 타려고 바삐 골목을 빠져 나오는 노동자들, 머리를 매만지면서 슈퍼에 가는 주부의 푸근한 얼굴 등 새벽 풍경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 속에서 꽃처럼 예쁜 젊은 여공의 얼굴도 더러 발견할 수 있었다. 밤 근무를 한 동료 여공과 교대시간에 맞춰 가는 여공일 것이다. 막 화장을 마친 정결한 얼굴이 아직 촉촉해서 보기 좋다. 화장이 잘 받은 얼굴, 어젯밤 여공은 눕자마자 바로 잠들어서 충분히 잔 것이 분명하다. 잠을 설치면 화장발이 안 받는다는 아내의 말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짜라투스트라’ 의 말이 아니더라도 불면증인 나는 눕자마자 바로 잠드는 사람을 존경한다. 전에 농부(農婦)이신 우리 할머니가 그러셨기도 하지만 삶에 애착하는 사람이나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새벽 골목에서 보는 나이 어린 여공의 화장이 예쁜 얼굴은 깨끗하게 간수한 소액권처럼 귀해 보인다.


모처럼 집 앞을 쓴다. 그래서 그럴까, 깨끗이 쓴 내 집 앞을 지나가는 새벽 출근자들이 내게 미소짓는 것 같다. 새벽에 깨끗이 쓴 내 집 앞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예쁘게 새벽 화장을 한 얼굴을 남에게 보이는 여공의 마음 같아서 기분 좋다.


날이 환히 밝았다. 경운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싣고 간 총각무를 다 팔았을까 못 팔았을까. 나는 경운기에 싣고 간 총각무를 남겨 가지고 돌아오기를 바란다. 그들이 싣고 간 총각무를 남겨 가지고 돌아오기를 바란다. 그들이 싣고 간 총각무가 새벽장에서 다 팔기에는 좀 많아 보였었다. 나는 남아도 헐값에 시장 상인에게 넘겨주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런 수단을 부린다면 이미 장사꾼이지 농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새벽장에 총각무를 싣고 갈 때, 농부는 한 단에 얼마나 받을 것이라고 금을 정했을 것이다. 그 금은 에누리가 용납되지 않는 정직한 농부의 자존심이라고 믿고 싶다. 나는 농부가 절대로 자신의 삶을 평가절하 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도시가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옐로카드와 레드카드가 난무하는 거친 삶들의 한 판 승부가 육십만이 출전한 청주라는 이 론그라운드에서 드디어 킥업된 것이다. 나는 어느 포지션에 서 있어야 하는가. 가로등 만치 확고부동한 포지션을 바라는 것은 허욕이다. 새벽에 경운기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서 집 앞을 쓰는 게 내게 맞는 포지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