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두 동영상을 보면 동일한 BBC 여기자가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의 퇴임 연설 직전 연설 내용을 취재한지 사흘만에 반기문 신임 유엔사무총장 취임연설 직후 면담을 하였다. 생글생글 웃는 BBC 여기자는 마치 반기문의 속을 들여다 보고 있는 듯하다. 앞으로 반기문 신임 유엔사무총장의 긴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12월 12일 트루만 대통령 도서관에서 코피 아난 사무총장은 1950년 한국전 발발 당시 유엔사 창설을 주도하여 공산군 침략을 분쇄하고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였던 트루만 대통령의 역할에 찬사를 보내며, 오늘날의 미국 정치 지도자들도 그런 트루만 철학을 계승하여 유엔에서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런데, 반기문이 어제(2006년 12월 14일) 차기 유엔사무총장 취임선서와 더불어 개혁의지를 밝혔다. 그런데, 그 개혁이란 용어가 우리에겐 신물난 용어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에게 개혁이란 나라 말아먹기, 공산당 미화, 김정일 핵무기 개발자금 퍼주기, 안보위기 초래하기, 전국을 카지노와 도박장으로 만들기 등을 의미하였기 때문이었다. 트루만 대통령에게 찬사를 보내느 코피 아난 사무총장의 연설이 아직 귀에서 쟁쟁하게 울리고 있을 때 반기문은 전임자의 업적을 송두리째 뒤업는 발언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성향이 다른 정당이, 특히 좌파 정당이 집권할 때 선임자들의 업적을 뒤집어 엎기 위해 개혁이란 말을 쓰는데, 그런 용어를 반기문이 유엔에 그대로 가지고 간 것이다.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1950년 한국전 참전 때처럼 미국이 유엔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미국 정계에 고언을 남기고 은퇴한데 비해, 반기문은 자기식을 밀고나가겠다고 밝혔다. 자신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국제사회의 분쟁 해결사가 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두 독재정권의 외교수장이었던 반기문은 어떤 행동을 보여주었는가? 한국 외교가 구한말 시대보다 더 후퇴한 노무현 정권 시대가 공교롭게도 반기문이 외교수장으로 있었던 바로 그 시기였다.
노무현 정권 시대의 한국 외교는 아마도 세계 외교사상 최악의 외교로 꼽힐 만하다. 그런데, 그 외교수장이 유엔사무총장이 되었다. 김대중에게 사기 당하였던 국제사회가 다시 한번 한국인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그런데 지금 반기문은 너무 자신만만한 말들을 내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금 세계 평화를 해치는 것은 김대중과 노무현의 북핵 개발자금 지원 정책이다. 김정일에게 핵무기 개발 자금을 지원해 준다는 것은 테러이스트들에게 핵무기 구입 기회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북한의 핵보유는 주변국들의 핵무기 개발로 그 영향이 파급되기 때문에 평화가 위협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말로 세계 평화에 기여하려면 노무현의 북핵 개발자금 지원 정책을 반대하여야 한다. 그러나, 조국에서 전혀 평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았던 그가--노무현의 북핵 개발자금 퍼주기를 단한번도 만류하지 않았던 그가--어떻게 국제사회 분쟁지역에서 해결사 노릇을 하겠다는 것인지 조금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반기문이란 이름은 유엔사무총장 출마설과 더불어 갑자기 유명해진 이름이다. 아직 우리는 그가 김대중, 노무현 독재정권 시절에 외교수장으로 떠올랐다는 것 외에는 그의 인물됨이나 정치 철학에 대하여 잘알지 못한다. 그런데, 코피 아난 전 유엔사무총장이 한국전 당시 유엔사를 창설을 주도하였던 트루만 대통령에게 극구 찬사를 보내었던데 비해, 반기문은 노무현이 유엔사 해체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던 시절 그 심부름을 하는 입장이었기에, 코피 아난 전 유엔사무총장과 정반대 편에 서있다.
한국인 반기문이 유엔을 이끄는 새해는 어떤 시대가 될 것인가? 과연 그는 기대해 볼만한 인물인가? 그러면 왜 노무현이 한국 외교 시계를 백년 뒤로 돌려놓고 있을 때 바른 말을 하지 않았으며, 노무현이 한미연합사 해체 음모를 진행시키며, 유엔사가 유명무실하게 해놓고 있었을 때 왜 바른 말을 하지 않았는가? 아직 우리는 반기문이란 인물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지만 바로 이 점이 석연치 않으며, 그가 한국인을 대표하는 인물이기에 유엔에서의 그의 첫발걸음 행보부터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한국인 중 첫 외교관은 이승만 박사였습니다. 그는 나라가 없었을 때 외교관이었으며, 유엔 창설에 기여하였으며, 유엔을 움직여 강대국의 신탁통치론을 막고 조선을 독립시킨 분이셨습니다. 1896년 2년제 배제학당을 수석으로 졸업한 청년 이승만은 벌써 세계 정세를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지금 절영도땅 일본에 대여 문제를 클릭하시면 홍안의 청년 이승만이 1898. 3. 19일자 협성회회보에 기고한 시론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서당에서도 한글을 가리키지 않았으며, 선교사들이 한글 띄어쓰기를 갓만들었을 무렵에 그의 한글 문필력은 과연 오늘날의 논객들도 우러러볼 만한 필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