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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 좌파들의 자식 미국유학 실태

Joyfule 2012. 3. 25. 08:13

 

 

반미 좌파들의 자식 미국유학 실태

 

 

反美 성향의 좌파인사 자녀 중 상당수가 미국 유학을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韓美 FTA 재협상(혹은 반대)을 주장한 한명숙(現 민통당 대표), 정동영(現 민통당 상임고문)의 자녀들이

대표적인 美 유학파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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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아들, 미국에서 커뮤니티 칼리지 다녀

한명숙의 아들 박한길은 일본에서 소학교를 다녔고, 미국에서 중학교 과정(미디어 프로방스 프렌드 스쿨)을 마쳤다. 

2000년 귀국한 그는 서울 목동 소재의 신목高를 졸업하고, 2004년 경원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2007년 2월 軍 제대 후 경원대 영어영문과를 자퇴하고 미국으로 유학, 美 엠마뉴엘 칼리지를 거쳐 2008년 벙커힐 커뮤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2009년 말, 한명숙이 국무총리로 재직하고 있을 때 곽영욱 대한통운 사장으로부터 美貨(미화) 5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이 일었다. 당시 검찰은 郭 사장이 韓 씨에게 건넨 돈이 박한길의 유학비로 쓰인 것으로 추정했다. 韓 씨 측이 재판부에 제출했던 학비가 검찰 조사와 달랐기 때문이다.

韓 씨 측 변호인은 박한길의 계좌 내역과 학비 내역을 재판부에 제출했고, 학비가 달랐던 것은 학교 측의 실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박한길이 미국 유학을 한 것은 사실로 드러나 일각에선 “미국을 적대시하면서 자식 유학은 미국으로 보낸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정동영의 장남은 美 명문 사립고에 스탠퍼드大 졸업

정동영의 장남 정욱진은 美 스탠퍼드대 화공과를 졸업했다. 2004년 2월 <일요서울>은 당시 열린우리당(열우당) 의장인 鄭 씨의 장남 욱진 씨가 연간 5만 달러의 학비가 들어가는 미국의 사립 고등학교인 브룩스 스쿨에 재학 중인 사실을 보도했었다. 이 매체에 따르면, 욱진 씨는 서울 대원외고 2학년 재학 중이던 2001년 미국 보스턴의 명문사립고 브룩스 스쿨로 유학을 떠났다고 했다. 이 학교의 수업료는 기숙사비를 포함해 6,100여 만 원이고 생활비까지 합치면 대략 연간 7,000만~8,000만원이 든다고도 전했다. 욱진 씨는 고등학교 뿐 아니라 초등학교 1~3학년도 미국에서 다녔다.

노무현 정권의 집권여당이었던 열우당은 평소 교육개혁을 강조해왔으며, 경쟁보다는 평준화 교육을 주장해왔다. 일부에서는 “평준화 교육을 외쳤던 鄭 씨가 정작 자신의 아들은 호화 유학을 보냈다”고 비판했다.

‘親北反美’ 학자 강정구의 두 아들도 미국에서 유학


노무현의 장남 노건호 씨도 2006년 LG전자를 휴직하고 美 스탠퍼드大 경영대학원(MBA 과정)에 유학했었다. 그의 사위 곽상언(現 변호사) 씨도 美 뉴욕大 대학원(로스쿨)을 졸업했다. 대통령 후보 시절인 2002년, “反美면 어떠냐”고 발언한 노무현은 대통령 재임 중 동맹관계인 미국과 잦은 不和를 겪었지만 정작 아들은 미국에 유학 보낸 것이다.

親北학자 강정구는 美 템플大와 위스컨신大에서 석ㆍ박사를 취득했다. 그의 두 아들도 미국과 관련이 깊다. 장남은 서울의 유명 사립대 졸업하고 2003년, 시카고大 로스쿨에 입학했다. 2009년 6월 졸업해 미국의 대표적 법률회사(로펌) 중 하나인 ‘클리어리 고트리브 스틴 앤드 해밀턴(CGS&H)’에 다니고 있다. 차남 역시 1995년 渡美(도미) 現地 고교를 다니다 귀국, 카투사에서 軍 복무를 마쳤다.

姜 씨는 대표적인 親北反美(친북반미) 학자다. 그는 2000년 12월 <월간 정토>에 기고한 칼럼에서 “광복이 되었을 때 만약 외세가 한반도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북한 뿐만 아니라 남한도 사회주의로 가는 것이 그 당시의 역사적 필연”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姜 씨는 또 2005년 7월 인터넷 매체 <데일리서프라이즈>에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라는 글에서도 6·25전쟁을 ‘통일전쟁이자 內戰’이라며 미국의 전쟁 개입을 비난했다.

그는 “집안싸움인 통일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 달 이내 끝났을테고, 우리가 실제 겪었던 그런 살상과 파괴라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전쟁 때문에 생명을 박탈당한 약 400만 명에게 미국이란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생명을 앗아간 원수”라고 규정했다. 姜 씨는 또 “거의 대부분은 그들이 ‘구세주’로 모시는 바로 그 당사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라며 거듭 미국을 비난했다.


두 아들 모두 미국 시민권자임을 숨긴 정연주

정연주 前 KBS 사장은 <한겨레신문> 논설주간이던 2002년 8월8일, 자신의 記名(기명)칼럼에서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병역면제는 자녀의 미국 국적 취득 등과 함께 우리사회 특수계급이 누려온 ‘특권적 행태’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는 터다. 특수계급의 행태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한 개 500만원하는 외국산 곰 인형을 버젓이 아이들 장남감으로 사다주고, 80평이 넘는 아파트 두 동을 털어 그 주변에 조깅 코스까지 만든다. 그런 기이한 행태들은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에서 길바닥으로 내쫓긴 사람들을 비롯하여 곰 인형 값의 절반도 훨씬 못되는 수입을 위해 한 달 동안 뼈 빠지게 일해야 하는 서민들의 분노와 저주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

 

鄭 씨는 이회창 후보와 그의 아들을 혹독하게 비판했으나, 정작 자신의 두 아들은 미국 시민권자로 병역을 면제받았음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가 KBS 사장으로 재임 중이던 2005년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아들의 병역문제가 불거지자 “(미국에 내린) 뿌리를 뽑아 (한국으로) 움직인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두 아들이 미국 시민권자임을 밝혔다. 이어 “18년 동안 미국에 머문 두 아이는 미국 시민권을 갖게 됐고, 나는 두 아이를 늘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불가항력적인 사유로 병역의 의무를 할 수 없었다고 해명한 것이다.

 

그러나 鄭 씨의 장남은 2005년 1월, 해외인력 채용코스로 삼성전자에 입사해 같은 해 7월, 한국 본사로 발령받아 10월 국정감사 당시 한국에서 근무 중이었다. 차남도 미국에서 귀국해 서울 홍익대 앞 카페에서 연주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鄭 씨는 두 아들이 이미 한국에 거주하고 있었음에도 “(두 아들을) 그리워하고 있다”며 거짓말까지 한 것이다.


고정간첩’ 김낙중의 아들도 美 스탠퍼드大 출신

김낙중은 1992년 10월 안기부가 발표한 ‘남한 조선노동당 간첩사건’에 연루됐던 인물이다.

이 사건은 건국 이후 최대 간첩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은 당시 조선노동당(이하 노동당) 서열 22위 간첩 이선실을 남파, 1995년 공산화 통일을 이룬다는 전략 하에 남한에 노동당 하부조직인 ‘중부지역당’을 구축했다.

 

중부지역당에 가입한 김낙중은 1955년 월북 후 南派(남파), 36년간 고정간첩으로 암약하며 북한에서 총 210만 달러(韓貨 16억원 상당)의 공작금을 받아왔다. 김낙중은 이 돈으로 이우재, 장기표 등 14대 총선 때 민중당 후보로 출마한 18명에게 모두 7,900만 원 상당의 선거자금으로 제공했다. 이 중 쓰고 남은 1백만 달러로 권총, 독총 등 공작 장비와 함께 그의 집 장독대 밑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김낙중은 對南(대남) 혁명공작의 업적을 인정받아 북한으로부터 91년 10월 ‘김일성 공로훈장’, 91년 12월 ‘민족통일상’을 받았고, 김일성이 특별히 보낸 산삼과 녹용을 선물로 받았다.

金 씨는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 8월, 刑집행정지로 출소했다.

김선혁, “주적개념 삭제ㆍ국보법 폐기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

김낙중의 아들 김선혁은 현재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1989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渡美, 美 스탠퍼드大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2005년 1월1일, <한겨레신문>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가 공동주최한 학술세미나에서 “남한이 북한의 붕괴나 정권 교체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며 “주적개념 삭제나 국가보안법 폐기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金 씨는 또 2007년 1월19일 ‘새로운코리아구상을위한연구원’이 발제한 ‘2007 대선국면과 진보개혁진영의 과제’란 글에서 소위 진보세력이 나아가야 할 대응책을 제시했다.

그는 “보수파의 급속한 조직화와 영향력 상승에 대응하여 ‘전국의 反보수여 단결하라’고 외쳐야 한다”며 “올해 대선에서 수구보수세력이 민주세력을 영구적으로 대체하는 역전 불가능한 자리바꿈이 일어난다고 경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金 씨는 또 “‘민주화’는 급속히 추억으로 변해가는 반면, ‘박제화’된 권위주의는 알콜처리 되어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모습으로 국민에게 다가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19년 장기집권 독재자는 여론조사 하나마나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숭앙되고, 쿠데타는 ‘혁명’으로 격상되며, 권위주의 리더십이 찬양되고, 개발독재가 ‘국가능력’으로 칭송되며, 밀어붙이기식 정책결정이 ‘추진력’으로 미화되고, 권위주의 시대의 경력이 버젓이 ‘실력’으로 둔갑된다”고 비판했다. 한국의 산업화와 산업화를 추진한 박정희 대통령의 노력을 사실상 부정했다.


‘양키 고 홈’ 외친 홍근수의 딸도 아이비리그 출신

대표적인 極左(극좌) 목회자인 홍근수 前 향린교회 담임목사는 주한미군 철수와 연방제 통일을 주장해 온 인물이다.

洪 씨는 자신의 논설집 <자주통일로 가는 길>에서 “4대 정치적 과제인 국가보안법 철폐, 평화협정 체결, 미군철수, 연방제적 통일을 확고히 추진해야 한다”며 “진정하고 가장 합리적이고 공정하며 가능한 통일방안은 연방제적인 통일방식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洪 씨는 또 2006년 3월17일 인터넷 <통일뉴스>에 기고한 칼럼에서 ‘양키! 고 홈!’의 유래를 소개했다.

그는 “‘양키 고 홈!’을 외치면서 그 자신 산 인간의 횃불이 되어 산화한 한 청순한 젊은 대학생이 시작했다”며 1990년 분신자살한 김세진(당시 서울대 재학)을 언급했다. 洪 씨는 “정의감과 조국애의 충동으로 그 자신이 인간횃불로 민족자주와 “양키 고 홈!”을 외치면서 산화하여 순교자가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金 씨의 분신자살을 ‘순교’로 美化하며 반미감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칼럼을 엮어 2006년《양키! 고 홈!》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었다)


자녀 미국 유학 드러나면 ‘침묵’

洪 씨는 反美발언과 미군철수 주장을 해왔지만, 정작 자신은 미국 브루클라인 소재 보스톤 한인교회에서 목회를 한 적이 있다.

그의 딸 홍정화(前 뉴욕이민자연맹 사무국장)는 美 명문 아이비리그 대학 중 하나인 펜실베니아대학을 졸업해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홍 씨는 2006년 5월, <뉴욕매거진>이 선정한 ‘뉴욕을 움직이는 파워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됐을 정도로 이민사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좌파인사들 자녀들의 미국 유학문제는 여러 차례 구설에 올랐으나, 당사자들이 뚜렷한 해명을 내놓은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적극적인 해명을 피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