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톱 깎아주는 남자 - 이영순
밤 12시를 숨가쁘게 넘어가는 시계 바늘 소리가 빈 공간을 팽팽하게 긴장시킨다.
행여나 하며 기다리는 시간들, 나는 버릇처럼 늦은 저녁밥을 먹는다.
단순히 위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편을 기다려야 하는 지금부터의
내 불안을, 남편에 대한 내 간절한 바램을, 눈을 뜨고도 당하는 가위눌림을 씹어 삼키기 위해 밥알을 삼킨다.
식어버린 찌개냄비, 오늘은 남편이 좋아하는 동태찌개를 얼큰하게 끓여놓고 호박잎도 데쳐놨다.
이런 것들 때문에 남편을 기다리는 밤이 더 초라하게 느껴진다.
남편에게 있어 소주 석 잔의 의미는 만취 상태를 뜻한다.
딱 석잔밖에 안 마셨다는 전화를 건 지가 벌써 4시간이나 지났다.
자동차는 제발 두고 오라고 한 내 말을 알아듣기나 했을까?
나는 또 하나의 바위 만한 자물쇠를 차고 언제나 그런 건 아니면서 언제난 그랬던 것처럼 남편을 애타게 기다린다.
어쩐 일인가? 새벽3시가 자났는데도 남편한테서는 연락이 없다.
지금쯤이면 술이 남편을 마시고 있을 것이다.
행여 실수라도 하는 건 아닌지, 혹 음주 운전을 하는 건 아닌지,
그 전처럼 지갑이며 소지품을 몽땅 잃어버린 건 아닌지. 온갖 방정맞은 생각에 나는 나대로의 형벌에 시달린다.
이럴때의 남편은 물가에 내 놓은 아이같다.
개 짖는 소리에도 내다보고 자동차 엔진 소리에도 외투를 걸쳐 보지만 밀물처럼 밀려오는 낭패감만 채워질 뿐 남편의 기척은 없다.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어린것들에게 이불을 끌어 당겨주면서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켜 보려 하지만 허사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숨가쁘게 질주해 가는 앰블란스 소리가 오늘따라 요란하다.
남편이 곁에 없는 시간에 듣게 되는 이 소리는 불안한 가슴을 더욱 조여들게 한다.
나는 왜 남편을 기다리는 시간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지 모르겠다.
꼭 내 영혼을 남편에게 저당잡힌 것 같다.
이런 불안과 침묵 속에서도 사랑은 깊어지는가 보다.
절망의 꼬리쯤에서 들어 온 남편, 세상에 이럴 수가! 음주 운전에 의해 집에 왔다니!
하나님 맙소사! 당신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가슴 깊이 쌓인 말들을 살타래처럼 풀어내는데
"여보 나 배고파...."
내 잔소리 따위는 아랑곳없이 밥상을 끌어당기는 남편이 야속하다.
참아야지 내가 참자. 남편은 지금 酒님과 함께 있으니.
당신의 酒님때문에 나도 속상하고 가슴 저민다고 언제쯤이면 마음놓고 바가지를 긁을 수 있을까?
기분 언짢은 날은 언짢아도 못하고, 아침이면 출근길이니 못하고, 좋은 날은 좋은 기분 망칠까 봐 못하고,
이리 저리 남편은 내 화살을 잘도 피해간다.
이제 이런 기다림 후에 나에게 찾아오는 내 습관성 편두통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남편이 먹다 남긴 찌개국물과 거무튀튀하게 변색되어버린 호박잎을 쓰레기통에 거친 손놀림으로 버리며,
이제 다시는 이런 궁상맞은 음식은 해먹지 말아야지 엉뚱한 곳에다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고통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주어진다고 했던가.
따지고 보면 대수롭지 않은 혼자만의 가슴앓이인지도 모른다.
진통제 한 알로 달래질 수 있는 편두통쯤이야 얼마나 우스운 호사인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남편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숨길 수 없다.
떵떵거리고 호강하고 살자는 것도 아니고, 사랑타령으로 한 세상을 살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기 한 몸 건강이나 지켜 달라는건데, 그것조차도 제대로 이해못하는 남편이라고 미워하기도 했다.
조금 있으면 간밤의 일행들로부터 뒤늦은 안부 전화가 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또 억지 웃음으로 그들에게 가식에 찬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제발 부탁이니 술을 마셨을 때는 운전만은 말려 달라고 부탁 하기도 한다.
다음 날 저녁에는 남편은 아주 딴 사람같이 전혀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슬며시 내 발을 끌어당긴다.
그리고 발톱을 깎아 줄 것이다.
남편은 내게 미안한 일이 있을 때는 다 자라지도 않은 내 발톱을 딱딱 잘라낸다.
살며시 머리 내밀고 있는 자신에 대한 미움의 싹을 잘라내기라도 하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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