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7월이면 미국과 베트남이 수교한지 10주년이다. 미국은 이미 베트남의 최대
교역국이다. 지난해 양국의 교역액만도 64억 달러(약 6조5000억원)에 이른다. 이 가운데 지난 6월21일 판 반 카이 베트남 총리가 워싱턴을
방문해서 조지 W 부시 미국대통령과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했다. 양국이 ‘동반자 관계’가 되는 순간이었다. 정상회담 성과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양국의 군사협력. 미 국방부는 외국군 교육과
훈련을 위해 마련한 국제군사교육훈련(IMET) 프로그램으로 베트남군을 훈련하기로 했다. 앞으로 베트남군은 미 군사고문단으로부터 의료, 기술 및
영어 교육과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게 되었다. 미국의 군사교육을 받은 베트남의 젊은 엘리트 장교들은 초창기 한국군이 그랬듯이 베트남 군부에서
중추가 되는 친미세력으로 성장할 것이다. 필자는 1999년 8월 말, 동티모르 수도 딜리의 UNAMET(유엔동티모르선거지원단)
본부에서 베트남 언론인 A를 만난 적이 있다. 당시 동티모르는 독립을 반대하는 반군들의 내란으로 온 나라가 불타고 대량학살과 약탈이 벌어지고
있었다. UNAMET 본부는 전세계에서 몰려든 유엔 직원과 자원봉사자, 종군기자로 북적였다. 아마 이 때 동티모르 상황이 1948년 유엔 감시
아래 제헌의회가 수립되고 대한민국을 건국하던 우리와 비슷했을 것이다. 이 난리통에서 필자와 A는 금방 친해졌다. 나이 차는 좀 있었으나 그와 나는 쌀을 먹는
한자 문화권에 식민지와 분단 경험이 있으며, 동족 전쟁까지 치른 나라 국민이었다. 당시 A의 나이는 40대 끝자락이거나 갓 50세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같은 호텔에 묵었던 그와 나는 사흘동안의 저녁시간을 ‘빈탕 맥주’를 마시며 같이 보냈다.
나는 그에게 베트남의 독립영웅 호찌민을 존경한다고 말했던 것 같다. 프랑스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독립투쟁과 남북 베트남 통일전쟁을 진두에서 지휘하고 마침내 통일 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 된 호찌민은 당시 나에게는 우상이고 영웅이었다.
대학시절 읽었던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베트남 민족해방운동사’, 구엔 반봉의 소설 ‘흰 옷’,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 정지영이
감독하고 안성기가 주연한 영화 ‘하얀전쟁’을 이야기하며 나는 호찌민 이야기로 열을 올렸다.
그런데 왠지 A는 나의 호찌민 찬양에 맞장구를 치지 않았다. 무언가 마뜩찮은 것 같았다.
듣기만 하던 그는 자신이 통일 베트남 전쟁 당시 참전 군인이었다고 운을 뗐다. 나는 잠시 숙연해졌다. 베트남전에는 한국도 군대를 보낸 처지
아닌가. 그는 자신도 한국에서 존경하는 인물이 있다고 말했다. 누구냐고 물으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박정희를 존경한다. 현재 베트남과 한국이 왜 국력 차이가 나는 줄 아는가. 베트남에는
박정희 같은 건설영웅이 없었다. 베트남이 한국보다 못할 이유가 없다. 프랑스와 민족해방투쟁을 벌여 승리했고 세계최강국 미국과도 싸워 이겼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조국통일까지 이루었다. 그런 베트남이 왜 한국보다 뒤처지는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베트남 언론인 입에서 박정희를
존경한다는 말을 듣다니? “한국이 국산소총, 국산 탱크, 박격포, 미사일을 개발하며 1970년대에 자주국방을
추진한 것이 누구 덕인지 아는가. 박정희 때문이다. 박정희가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하면서 미국에 애걸 반 협박 반으로 얻어낸 것이다. 베트남
처지에서는 그는 침략 군대를 보낸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건설영웅이 베트남에 있었다면 현재 같은 후진국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까지 필자는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경력과 유신정권 당시 인권탄압에 집중하고 있었다.
열심히 A에게 박정희의 전력과 인권탄압 사실을 알렸으나 그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기만 했다.
필자가 6년 전 만난 A의 경우로 모든 베트남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것이 현재
베트남의 대세다. 베트남이 이렇게까지 변한 것은 철천지 원수 미제를 쫓아내고 자주통일국가를 이룬 뒤 과거사도 청산했지만, 이것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탓이다. 베트남은 20년 실험 끝에 결국 친미국가로 돌아섰다. 베트남 언론인 A가 필자에게 박정희를 존경한다고 말한 데는
자주통일국가 건설 이후 겪었던 그들의 뼈 아픈 시행착오가 깔려 있다. 물론 베트남과 미국의 밀월에는 전략적 이해관계가 숨어있다. ‘도이모이’ 이후 베트남은
미국과의 관계 확대가 필수적이다. 경제 교류 확대가 필요하지만 사실은 안보적인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다.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중국 침략을
받은 나라다. 미국과의 군사협력은 원교근공(遠交近攻), 즉 영토적 이해관계가 없는 미국의 군사적 힘을 빌어 안전을 보장받고 중국의 남진을
막겠다는 전략이다. 이번 방미 길에 판 반 카이 총리는 베트남에 미군기지가 들어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양국간의 분위기를 보면 이런
일이 실현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현재 노무현 정부는 베트남 언론인 A가 한국에서 가장 존경한다던 박정희를 ‘오욕과 뒤틀린
역사’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 베트남이나 한반도나 중국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은 역사는 한가지인데 한국군은 50년 한미동맹을 두고 중국으로 기울고
있다.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는 북한은 철천지 원수 미제를 한국에서 몰아내는 날, 통일과 평화가 온다고 선전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친김정일 세력과
한총련 대학생들은 북한의 이런 노선에 동조하고 있다. 북한의 김정일 정권과 한국의 친김정일 세력도 아마 언젠가는 베트남처럼 자신들의 이데올로기가 민중의 빵과 나라의
안전보장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때까지 북한의 민중들은 얼마나 고통을 겪고,
대한민국은 어디까지 추락할 것인가. 최삼봉 (국제정치 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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