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김요한목사

부분과 온전함의 차이를 파악하라.

Joyfule 2023. 5. 7. 01:03





    부분과 온전함의 차이를 파악하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장9-10절)

 

 고전13장은 성령의 나타나심의 은사와 사랑에 대한 비교를 하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12:31절부터 시작이 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제일 좋은 길은 전혀 다른 차원의 길입니다.

성령의 나타나심의 은사와 존재로 임하신 사랑의 차이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결론을 맺습니다(고전13:13)

사랑은 신앙의 결과이며 신앙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진화의 종국이라고 말한 겁니다.

반드시 완성되고 성취되어야 합니다.

천국은 사랑 밖에 없는 곳인데 사랑의 체질이 되지 않고 거기에 가면 더 불편하겠지요?

고린도교회는 은사는 있어도 이 사랑의 법이 적용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랑은 장차 되어 질 미래적인 사건입니다.

그런 신앙이 지금도 많지요. 가능성을 두고 될 줄로 믿습니다 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그들을 향해 사랑을 추구하라(고전14:1)고 권면합니다.

이건 장차 될 일로 미루지 말고 당장 착수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의 독자인 우리들에게도 들려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사랑하기 원합니다 하고 노래를 부르고

베드로의 고백처럼 난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불러댄다고 될 일이 아니죠.

베드로의 고백에 대한 해석도 잘 못되었고 되지 않는 환상적인 노랫말일 뿐입니다.

그 노래 부른다고 반짝하는 것 말고 사랑이 지속이 된 사람이 있으면 어디 나와 보세요.

 

고전 13장을 분류해 보면

1) 1-3절까지는 전부가 다 은사입니다

2) 4-7절은 사랑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능력임을 소개합니다.

3) 8-13절엔 사랑이 오면 되어 질 영적인 상태를 말씀합니다.

사실 은사와 사랑은 별개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바깥에 나타나심이 은사이고

성령이 안에서 임하여 내주 역사하시므로 내부수리를 마치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충만해 지므로 나타나는 존재이며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오면 은사는 끝납니다(8-10절)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성령의 나타나심의 은사도 가지시고 사랑도 가지셨습니다.

그리스도를 그 중심에 모신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교회는 은사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그 은사보다 사랑 곧 그리스도를 모시고 나서 그 분을 표현하여 나타내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도 아니고 형제사랑이나 친구의 우정도 아닌 바로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1절)

만약 내가 뱉어내는 말 속에 핵심인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됩니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허무한 경우를 많이 경험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우리의 말엔 영과 생명(요6:63)이 흘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고 하십니다(고전4:20절)

요한계시록은 쌍방의 말싸움이라고 보면 됩니다.

선거 유세하는 것과 같습니다.

안 될 것 같으면 거짓말을 하고 중상 비방합니다.

지금의 정치판의 말싸움을 자세히 보세요.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2절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하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7:21-22절과 같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는 은사만 있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주와 하나가 되어 주를 나타내는 몸 사랑이 없는 불법이 되고 맙니다(마7:23)

은사의 사람과 그리스도의 사람은 서로 다를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내주 역사하시므로 밖으로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으면 진짜입니다.

예컨대 의료행위를 한다고 다 의사가 아닙니다.

의사의 정신은 오직 의사만 갖습니다. 돌팔이는 병만 나으면 된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3절)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더라도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구제하고 몸으로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들은 인간의 의지로도 가능한 일입니다.

예를 들면 노동계의 전 아무개를 보세요.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노동계의 예수라고 부릅니다.

그 사람의 희생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없이도

자신의 몸을 내 던질 수도 있다는 예를 드는 겁니다.

 

1절은 내용은 은사냐 생명이냐 하는 문제를 따집니다.

2절은 존재입니다. 내가 맡은 직분이냐 내게 있어서 그리스도냐는 거죠.

3절은 사역의 결과적인 유익이 뭐냐 남은 것이 뭐냐 사랑이냐 돈벌이냐는 거죠.

사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본인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신앙은 자신이 있어야 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사랑은 배신으로 인한 증오로 끝이 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는 반드시 동반자가 있습니다.

4-7절은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디느니라‘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나타나는 행위들인가 아니면 어떤 상태들인가를 논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인데 왜 못 참아 이 사람아 이런 식으로 나오지 마세요.

오래 참는 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성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성전을 둘러엎고 저걸 허물어라 하신 예수님은 사랑이 하나도 없는 분입니다.

4-7절의 내용은 사랑의 속성이지 인간의 속성이 아닙니다.

사랑이 능력이 되어 그 사랑으로 되어지는 긍정이 되기도 하고

그 사랑으로 인해 안 되기도 하는 부정적인 내용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싫은 것은 결국 안하게 됩니다.

사랑의 사람은 투기와 시기, 자랑 같은 것이 싫어집니다.

이런 건 안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사랑이란 말입니다.

 

어떤 행함이 있는 긍정적인 요소도 그 사람의 의지적인

훈련에 의한 노력이 아니라 그 사랑으로 인해 본질적으로 그렇게 변해 갑니다.

7절의 모든 것은 바로 그 무엇입니다.

의미 있는 다수 곧 여러 가지입니다.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은 어떤 목적 때문입니다.

사랑도 어떤 목적이 있다는 말이며 미래가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의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였던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 그 부활의 생명과 연합이 된 거죠.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는 사랑의 사람으로 자라갑니다.

하나님의 책망과 격려와 생명과 양식, 위로, 채찍

그리고 징계를 동원해서 그렇게 양육해 가십니다.

8절의 예언 방언 지식은 은사입니다. 곧 도구이므로 결국은 폐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존재 자체이므로 폐할 수가 없습니다. 항상 있는 생명력입니다.

은사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나타나심이니까...

그렇지만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고 항상 붙어 있습니다.

살아있고 존재하고 역사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사랑하게 합니다.

존재인 사랑이란 명사에서 동사인 사랑한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예언과 방언과 지식이 사랑과 대조되는 이유는?

이런 은사는 사랑에서 나온 영향력이요 사랑은 그 본체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라는 카리스마는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9절 부분적이라는 part는 육체적인 개념입니다.

영생도 은사(롬6:23)입니다만 사람들이 보통 은사라고 말하는 건 육체적인 개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전체와 부분의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완전과 불완전한 것과 위의 것과 아랫것의 대비입니다.

10-11절 온전한 것(약1:17-18)은 장성한 것 그리고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겁니다.

그러나 부분적인 것은 어린아이의 것이며 구리거울로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합니다.

장성한 자와 어린아이는 말과 생각과 깨달음이 다릅니다.

지금 어린 아이들이 직분을 받아 정치인과 같이

제 말만 맞다 하며 말싸움을 벌이고 있지 않습니까? 가관입니다.

부분과 온전함은 차원의 차입니다.

위엣 것과 아랫것의 차입니다.

그런데 지금 피조물들이 이 아랫것들에게 굴종하면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장성한 자는 어린아이의 일 곧 말과 생각 깨닫는 것을 버립니다.

바로 히6장의 사람이 됩니다.

 

고전13:11절은 차원이며 12절은 내용입니다.

이는 때가 되어야 합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죠.

비울은 바로 이 길을 보고 추구하라(고전12:31)고 권면합니다.

12절의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본다는 말은 거울로

말미암아 반사 되는 것을 보던 것이 얼굴의 실체를 본다는 말씀입니다.

사도요한은 이를 두고 생명의 말씀을 보고 듣고 만졌다고 표현합니다(요일1:1)

실감했다는 말입니다. 요즘 제 주변에서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 제게 양식이 됩니다.

그 때에는 주께서 알리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확실하게 온전히 안다는 말이죠.

주께서 나를 알리신 것을 이제 내가 알게 되리라.

사실 주를 알아가는 것은 자신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으면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이 발견됩니다.

얼굴과 얼굴이 서로 보는 것처럼 주께 붙잡힌 것을 붙잡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믿으며 바라며(7절) 하는 말씀은 롬8:18, 24의 말씀과 상통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의 자유를 학수고대를 하는 거죠.

이것이 우리의 바람이고 사랑은 그 바람의 성취물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소망은 과정이지만 사랑은 완성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항상 있는 것입니다(13절)

바울이 왜 고전13장을 12장과 14장 사이에 끼어 넣었을까요?

고린도교회의 현재상태는 나타나는 은사만 있고

사랑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고전15장의 말씀의 이해와 적용이 아직 그들에게 요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의 섭리를 그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 점과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점들이 선이 되고 그 선들이 원이 되어 영원한 세계를 이룹니다.

우리가 믿고 소망하는 하늘나라는 사랑 밖에 없는 영원한 세계입니다.

좀 예민한 내용이라 고린도전서 강해를 원본으로 좀 길게 글을 써 봤습니다.

작금의 교회의 모습에 한계를 느끼고 사랑을 추구하고 싶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