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신앙인물

[빛을 따라간 사람들] - 썬다 싱

Joyfule 2018. 4. 14. 11:08

 

[빛을 따라간 사람들] - 썬다 싱

 

티베트에 빛을 ....

 

썬다 싱은 스물네 살이 되던 1913년 봄, 티베트으로 또다시 전도여행을 떠났다. 라자르시라는 곳에서 전도를 하고 있었는데 매우 큰 핍박을 받게 되었다. 처음 전도하기 시작할 즈음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그의 설교를 들었는데, 이 소식이 수(首)라마에게 전해지자 썬다는 즉각 체포되어 끌려갔다. 그리고 수라마의 명에 의해 깊게 파진 마른 우물 구덩이에 처넣어지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는 옷을 벗기운채 우물 안으로 처넣어졌다. 오른팔이 부러지면서 떨어진 우물 안에는 이미 먼저 떨어져 죽은 사람들의 시체들과 더러운 뼈다귀들이 뒹굴고 있었고, 돌틈으로는 징그러운 뱀들이 기어다니고 있었다. 밤과 낮이 없는 그 처참한 암흑의 구덩이에서 음식도 물도 공기도 없이 사흘 밤낮을 잠 한숨 자보지도 못한 썬다는 죽음이 가까와 옴을 느꼈다.

 

썬다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간절히 기도했다. 정말 죽음을 넘나드는 간절한 기도를…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점점 그의 마음 속에는 큰 기쁨이 흘러들어 왔고, 그토록 소름끼치는 무서운 곳에 있다는 것을 잊을 정도의 큰 평화가 마음 속에 가득차게 되었다. 썬다는 이 때처럼 예수님께서 주신 평화와 희열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예수님의 평화는 그 지옥같은 우물을 천국의 문으로 변화시켰다. 죽은 사람들의 뼈와 시체속에서,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썬다는 더욱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것을 체험했다. 기쁨에 들떠 있을 때, 우물 뚜껑이 열리더니 “로프를 잡으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로프를 잡고 위로 올라갔다. 밖으로 나온 썬다는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구조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푸신 것이다. 날이 밝자 썬다는 몸을 씻고 다시 전에 전도하던 시장거리로 나갔다. 그는 또다시 체포되어 추방되었다.

 

라자르에서 추방된 후에도 썬다는 죽을 각오로 티베트 곳곳에서 전도를 계속했다. 썬다에게 있어 티베트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결심은 이제 하나의 신념이 되었다. “살아생전에 이 십자가를 지지 못하면 나는 영원히 이 십자가를 지지 못하고 말리라. 아무리 그 십자가가 무겁더라도 나는 주님 발치에서 묵묵히 그를 따라 골고다로 올라가야 한다. 히말라야의 일각, 이 작은 티베트에만은 주님의 빛을 비춰주어야한다.”

 

거머리 형벌

 

1914년 6월 7일, 썬다는 히말라야의 동쪽 산령에 있는 네팔의 일람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음 날인 6월 8일, 썬다는 일람부락에 닿아 사람들에게 네팔어 성경을 읽어주고 있었다. 관리들이 와서 몇 번 하지말라고 경고를 했는데 썬다는 계속해서 전도를 하다가 결국 체포되어 칙칙한 지하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들은 썬다의 옷을 전부 벗기고 착고를 채워 꼼짝을 못하게 한 후 그의 앞에다 많은 거머리 떼와 뻘 오물을 두고 욕을 하며 나갔다. 얼마 후 거머리 떼는 썬다의 전신으로 기어오르며 피를 빨기 시작했다. 썬다는 두서너 시간 동안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견디다가 온 힘을 다해 찬송과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순간 고통이 멎고 감옥은 천성같이 변하였다. 큰 기쁨 속에서 썬다는 더욱 힘차게 찬송을 불렀다. 그랬더니 이 예상치 못한 광경을 보려고 사람들이 몰려왔다. 썬다는 착고에 채인 채로 그들에게 또다시 전도를 하였다. 관리들은 그토록 큰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쁨이 충만하여 찬송하며 전도를 하는 썬다를 보고는 놀라움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며 다음 날 그를 석방시켜 주었다.

 

썬다는 풀려나서 자신이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렸다. 그리고 휘청거리는 몸으로 100리밖에 떨어져 있는 다르질링까지 하루를 꼬박 걸어갔다. 다르질링에 살고 있던 탈진은 썬다를 만나자 그의 피부가 옥도정기 같이 붉게 변해있고, 전신은 온통 뜯겨 부어올라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고 궁금해 했으나, 썬다는 그 박해사건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주님의 겸손을 본받고 싶어서였다.

 

주여! 저를 붙들어 주소서.

 

1916년 11월부터 1917년 1월까지 3개월 동안 썬다는 북인도의 소읍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했고, 1918년에는 멀리 에베레스트산의 봉우리가 보이는 지역에서부터 캄바종지역, 팅그리지역, 귀이롱, 니아람딩게, 강쯔 일대까지 두달 동안 전도를 했다. 그는 그곳에서 많은 핍박을 받았고, 가는 곳마다 내쫓김을 당했다. 그 때마다 그는 “긍휼이 많으신 주시여, 이 보잘 것 없는 것을 붙들어 주옵소서. 제가 어둠을 이기지 못하여 믿음을 잃을까 두렵사옵나이다”하고 간절히 기도하며 다음 마을을 찾아가곤 했다. 신기하게도 기도만 드리면 주님께서는 그의 상한 마음을 위로하여 주셨고, 무너져 앉은 신심을 되살아나게 하셨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의 겸비를 배우겠다고만 하면 주님은 언제나 산성처럼 확고하게 썬다의 영혼 깊이 거하여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인도하여 주셨다.

 

남서부 인도로

 

1918년, 29세가 되던 해부터 썬다는 전 인도의 기독교계에 명성이 높아져 여러 곳에서 초청을 받게 되었다. 집회시마다 청중들은 그의 인격의 진실함과 겸비, 또 회개의 능력을 갖춘 설교로 인하여 눈물의 바다를 이루었다. 어느 때는 수백명, 어느 때는 수천명의 청중이 운집하여 그의 말을 들었다. 가는 곳마다 교회가 부흥되었고 많은 결신자들을 내었다. 그러나 썬다는 꽉 짜인 전도일정 가운데서도 기도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복음전파란 기도가 피어내는 영성의 꽃 이외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자신을 ‘사두’가 아닌 ‘작은 형제’라고 소개하곤 했는데 그의 뇌리에는 늘 이러한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나면서부터 요람이 없어서 마굿간의 구유 통에 뉘여지셨고, 돌아가셔서도 묻힐 곳이 없어서 남의 무덤자리에 묻히셨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낮아짐을 배우는 일이요,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다. 천대받는 말석의 군중 속에 계신 예수님. 그 낮은 사회적 희생자들과 함께, 그 낮은 민중들과 함께 혁명을 해나가는 정신적인 왕국. 이 불굴의 해방정신, 영원히 사는 것이 기독교인의 정신이 아닌가!’ 남서부 인도를 돌면서 인도문명이 낸 상처, 그 빈민굴들과 하리잔 제도를, 크리스천들부터 돌보아 주고 타파하라고 외치며 썬다는 그의 전도지를 동으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