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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물꽃 향기 - 이정원

Joyfule 2013. 4. 13. 00:43

 

  산수유 물꽃 향기 - 이정원

 

 

꿈속에서 맡은 향기가 깨고 나서도 그대로 코끝에 맴돌 수가 있는 걸까. 몇 년 전, 한 해가 시작되는 날 꾼 꿈은 눈을 뜬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던 향기와 더불어 내용도 특이해서 쉽사리 지워지지가 않았다.

어느 산인지는 분명치 않았으나, 퍽 낯이 익은 산길을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오르고 있었다. 연녹빛 나뭇잎을 조용히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지는 오후였다.

 

걷다가 문득 눈을 들면 파란 하늘은 보이질 않고 나뭇잎으로 된 야트막한 하늘이 다가오곤 했다.

그 하늘만큼이나 싱그러운 웃음을 나누며 얼마를 가다 보니, 갑자기 끝이 올려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고 가파른 오르막같이 나타났다. 크고 작은 돌들이 얼기설기 쌓여 있는데다가 꼭 한사람씩밖에는 다니지 못할 정도로 폭이 좁았다.

의아한 건, 줄곧 앞에서 걷던 몇 사람이 그 길에 이르더니만 나더러 먼저 올라가라고 등을 떠미는 거였다. 보통 땐 앞으로 가려고 해도 뒤만 따라오라던 이들이, 그것도 오르기가 어렵게 생긴 길에서 이러나 싶어 야속했다.

 

 

실랑이를 하다가, 결코 물러날 것 같지가 않은 그들의 태도에 밀려 하는 수 없이 맨 앞에서 오르기 시작했다. 두 번 다시 따라나서지 않으리라 하며 한 참을 오르노라니 위쪽에서 누군가가 손짓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처음에는 올라도 올라도 보이지가 않을 것 같던 길의 꼭대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꼭대기의 양쪽에 파르스름하게 머리를 깎은 여승 둘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손에는 꽃가지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눈에 힘을 주며 유심히 바라보니, 그 꽃가지는 노란 꽃이 활짝 피어난 산수유였다. 산수유꽃이라는 걸 아는 순간, 그 향기가 아련히 코에 전해져 왔다.

 

그와 함께. "어서 올라 와요.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하는 여승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를 행해 손짓하는 꽃가지를 따라 오르는 길은, 그러나 그 뒤로도 수월치는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금세 오를 듯 싶은데, 꽃향기만 조금씩 가깝게 맡아질 뿐 꼭대기는 여전히 멀었다. 얼마를 미끄러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며 다 올라갔을 땐, 등이 푹 젖어

 

내가 마지막 발자국을 힘겹게 올려놓자, 여승들은 들고 있던 꽃가지를 흔들며 잘 왔다고 반겨 주었다. 꽃향기가 어찌나 진하게 코에 스며들어 오는지, 잠시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그 향기는 마치 선계의 것이라도 되는 양, 일순간에 신비로운 느낌에 감싸이게 만들었다.

 

한동안 눈을 감고 꽃향기에 취해 있다가, 그제서야 나더러 앞서 오르라고 했던 사람들 생각이 났다. 길을 오르기 시작한 후로는 한번도 뒤돌아보질 않았는데, 따라 올라온 그들도 향기에 취해서 있는 걸까.

하지만, 눈을 뜨고서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여승들도 간 곳이 없고, 향기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선뜻 이상한 기분이 들어, 길 아래쪽을 내려다 봤다.

 

다시는 내려갈 수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밑은 아득히 멀었다. 거기서 가물가물하게 움직이는 그림자가 함께 산을 오르던 사람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예 올라오질 않은 건지, 올라오다가 도로 내려간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위를 올려다보며 나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깨고 나서도 생생하게 코끝에 남아 있는 향기는 물론이려니와 내용 또한 예사롭지가 않아서인지, 꿈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만큼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곰곰이 돌이켜볼수록 죽음의 예시인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안겨왔다. 여승들이 나를 부르던 것이며,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떠나진 것 등으로 미루어 보아.

그러면서 얼마가 지난, 이른봄의 하루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새로 생긴 꽃집 앞을 지나다가 산수유꽃을 보게 됐다.

 

끌리듯이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자, 유독 그 꽃의 향기만이 꽃집 안에 그득히 퍼져 있었다. 길게 자른 꽃가지를 묶은 것이 한 단 있기에 싸달라고 했더니, 남자 주인이 다가오며 누가 부탁을 해 놓은 것이라 안 된다고 했다.

그냥 내게 파시라고 떼를 쓰듯이 말했더니만,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그 사람에게는 못 구했다고 하지요" 하며 신문지로 둘둘 말아 주었다.

 

내 키의 반은 됨직한 그 꽃묶음을 안고 집에까지 오는 동안, 술처럼 생긴 노란 꽃송이에서 풍겨나는 향기가 얼굴과 머리에 은은히 배어드는 것 같았다. 긴 꽃가지들을 뚝뚝 꺽어 하얀 항아리에 꽂아 놓자, 향기가 이내 방 안 가득히 퍼져 나갔다. 이파리라고는 없는 갈색의 마른 가지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꽃망울들이 모두 벌어지면서. 향기는 더욱 짙어졌다.

한껏 피어났던 꽃송이들이 제풀에 지쳐 떨어질 때까지, 내내 가시지를 않았다. 그 향기는 나로 하여금 산수유꽃의 꿈을 되살리게 했는데, 다행히도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만 여겼던 예전의 생각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누군가의 뒤를 따라 걷기만 하던 산길을, 여승들이 흔들어 주는 꽃가지에 이끌려 나 혼자서 올랐었으니, 그것은 어찌 보면 가까운 사람들에게 매달려 온 안온한 정신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이제는 깨치고 나가야 함을 이름이 아니었을까. 그 해석이 들어맞기라도 한 것인지, 그 한 해 동안 나는 별탈 없이 지내오던 사람들을 여럿 잃었다.

전에는 눈에 띄지 않던 허점들로 하여, 그들이 내 안에서 차지하고 있던 비중이 줄어들면서 차츰차츰 새가 떠진 거였다.

빛나는 별로 가슴의 밤하늘에 떠있던 그들이, 저 멀리 동이 터 오는 새벽 기운에 맥없이 빛을 잃어 가는 데는 망연할 뿐이었다. 그런 속에서 한 해를 보내고 났을 때, 꿈에서처럼 길고 가파른 영혼의 오르막길 꼭대기에, 외롭지만 강하게 서 있는 내 자신을 볼 수 있었다.

 

 

바닷물 속에도 노란 산수유 꽃이 활짝 피어나 있고, 그 향기가 코에 진하게 와 닿을 수가 있는 걸까. 그건 지난 해 일월, 필리핀 민도르 섬 앞에 있는 '산 아가피토'라는 포인트에서 다이빙을 했던 이른 아침이었다. 벌써 사흘째 이어지는 다이빙 일정에 좀 지친데다가 잠까지 설쳐 머리마저 무거웠다.

 

자연히 물 속에 들어가서도 신이 나질 않아서, 비탈진 언덕을 따라 느릿느릿 움이고 있었다. 한데, 약간 아래쪽에 있던 짝이 탱크를 두드려가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테이블산호며, 사슴뿔산호며, 바다나리며, 그 사이를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들을 원 없이 보았던 터라, 뭐 또 새로운게 있겠나 싶어 시들한 마음으로 내려갔다.

그러다 노란 폴립을 한껏 펼치고 있는 한 포기의 연산호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어서 와서 보라고, 계속해서 손짓을 해주고 있는 짝을 밀어 제치기까지 하며 바싹 다가갔다.

그것은 바위 틈새에 뿌리를 내린 연산호였는데, 아래로 늘어뜨려진 가운데 줄기에선 갈색의 잔가지들이 뻗어 나와 있었다.

그 가지에 촘촘히 붙은 노란 꽃망울들이, 터져 나오기라도 하듯이 피어 있는 모양은 영락없이 봄날 산에서 피어나는 산수유꽃이었다.

 

산수유라는 느낌이 듦과 동시에, 진한 그 꽃의 향기가 물안경 속에 갇힌 코에 스며드는 데는 나도 의아해서 믿어지질 않았다. 꽃가지를 감싸고도는 건 눈을 깜빡이고 다시 보아도 분명 바닷물인데, 그 속에서 그윽하게 풍겨나는 향기가 맡아지다니.

 

물 속에 들어가 머루를 때면, 가끔씩 이곳이 꿈속과 하나로 통하는 세계가 아닐까 했었다. 산수유꽃을 그대로 닮은 연산호를 대하는 동안, 몇 년 전에 꾼 산수유꽃이 되살아나 어느 때보다 그런 생각이 짙게 들었다.

 

꿈속의 꽃향기가 나로 하여금, 그 무렵 자나치리만치 강했던 사람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듯이 물 속에서 피어난 또 하나의 물꽃 향기는, 때론 내 스스로도 지치곤 하는 감정의 변화의 바람을 좀 잠재워 줄 수 있으려나.

혼자만이 본 듯한 신비스럽고 내밀한 물 속 산수유꽃의 정원, 그 곳을 두고두고 기억할 양으로, 그 연산호의 가지 밑에서 엷은 보랏빛 잔돌 하나를 주워 들고 나왔다.

 

그리고는 꿈속과 물 속에서 맡은 꽃향기가 그 돌에 오롯이 배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잘 간직해 두었다.

 

수필가. 한국수필로 등단. 한국수필문학상. 수필집 '어느꽃인들 이쁘지 않으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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