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항 앞에서 - 오덕렬
"야! 우렁이 새끼다."
밖에서 들어온 큰애가 어항 속을 들여다보며 쩌렁 소리를 질렀다.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앞쪽 아파트 현관에도 불이 켜져 있다.
텔레비전 앞에 있던 두 놈이 우르르 어항 앞에 몰렸다. 신문을 보던 나도 어느새 어항 속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신비의 물체 다섯 점(點)이 어항 벽에 붙어 있었다. 그것은 껍질까지도 섶에 오르는 누에처럼 투명한 우렁이 새끼였다. 생명의 탄생은 생각해 보면 볼수록 신비의 베일에 싸인 저쪽의 세계였다. 자연의 순리가, 우주의 이법이 이 어항 속에 있었다.
우리 식구들은 머리를 부딪쳐 가며 신비의 점을 더 가까이서 보려고 비벼대며 밀고 밀렸다. 어린것들이 더 신기한지 야단이었다. 나도 갓 태어난 우렁이 새끼를 눈앞에 대하기는 처음이었다. 감동의 한식경이 지나서야 나는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볼 마음의 여유를 가졌다.
우리집 어항은 플라스틱 그릇 - 정확히 말하면 냉장고의 야채상자 - 이다. 여기서는 값비싼 열대어나 금붕어는 살아본 적이 없다. 하지만 시골 논배미의 물꼬 밑에서 잡아 온 미꾸라지, 피라미, 송사리와 둠벙에서 잡은 물방개, 물매암이, 게아제비도 함께 살았었다. 그리고 무등산 계곡의 다슬기도 마다 않은 작은 수족관이었다. 그러니까, 어린것들이 물에서 얻은 것은 모두 한식구가 되었다.
불볕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경이를 탄생시킨 우렁이는 지난 봄 날 광주 중외공원 낚시터에서 시집왔었다. 그때만 해도 바람 끝이 찼었다. 봄나들이를 나간 우리는 낚시질할 때 쓰는 뜰망을 가지고 호숫가를 더듬었다. 뜰망 속에 갇혀 나온 각시붕어 몇 마리와 우렁이 두 마리가 비닐봉지에 넣어져 집에 왔다. 어린것들은 호기심과 함께 그것들을 어항에 넣었다. 그리고는 어항을 뚫어지게 보고 또 보았다.
"느그들도 잘못 앵켰다."
어린것들의 손때에 얼마나 성가심을 당하랴 싶어서 절로 나온 말이었다. 어린것들은 처음에는 혹했다가도 날짜가 지나니 시들해졌다. 별수 없이 어른들이 건사해야 했다. 앙증스런 송사리 떼가 수면에서 그 작은 입을 빠끔대고 있었다.
어항의 물을 갈아 줄 때가 되었다. 아내가 낚시터의 호숫물 대신에 가까운 논물을 떠왔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 될 줄이야! 이곳 아파트 단지 앞의 논에서 가져온 물을 갈아주자 하룻저녁 사이에 어항 속은 이변이 생기기 시작했다. 주인을 원망하며 배를 하늘로 쳐들고 죽어간 놈, 물 위에 뜬 놈, 가라앉은 놈 ……. 다슬기와 우렁이만은 생사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우렁이는 물을 갈아준 뒤, 한나절이 지나자 더듬이를 내밀고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지혜롭게 입을 꼭 다물고 물 한 모금 머금지 않았던 것일까? 그러나 다슬기는 끝내 입다문 채 아무런 기색이 보이질 않았다. 우렁이는 한꺼번에 어항 속 식구들을 다 잃고도 슬픔을 안으로 삭였는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집을 지키고 있었다.
요즘은 우렁이 새끼의 성장과정과 생태를 지켜보는 것이 낙이 되었다. 처음 녹두알만 하던 것이 달포 지나니 제법 애티를 띠었다. 어미 우렁이는 몸뚱이에 청태까지 끼어 거무튀튀한 게 말밤만하여 바위처럼 의젓해 보이기도 했다.
우렁이는 싫으면 입을 다물고 무표정하다. 무언으로 우리 인간에게 항변하는 것일까? 물이 맑아야 우렁이가 살고 우렁이가 살아야 우리가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가르쳐 주는 것 같다.
무등산 계곡에서 다슬기를 줍던 때였다. 바위 서리에서 한 마리 한 마리 찾을 때면 어린것들은 이산 가족의 재회처럼 기뻐했다. 그런데 그 다슬기가 어항에서 입다물고 죽어갔다.
"왜, 이렇게 죽었데?"
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떼었다. 어린것들은 약간 겁먹은 눈들을 하고 고개만 살래살래 저을 뿐 말이 없었다. 다슬기의 주검을 손바닥에 놓고 광주천의 흐르는 물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광주천의 물은 무등산 계곡의 맑은 물로 발원하여 시내를 흘러내리는 동안 폐수가 되어 주검처럼 밀려 내려간다. 그러나 광주천에서도 물고기가 햇살을 받으며 물 위를 비상했던 때가 있었다. 그땐 광주천변과 무등산의 갈대가 나무꾼의 지게 위에서 갈꽃을 피웠다. 또한 천변 빨래터의 여인들이 풍속도처럼 아름다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폭의 군선도(郡仙圖)를 보았던 것만 같다. 그런데 오늘날의 물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별나게 무더웠던 올 여름은 더위만큼이나 행락 질서도 무질서가 극을 이루었다고 매스컴들은 떠들어댔다. 나의 눈에도 인간오염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다. 인천 앞 바다 고기의 떼죽음도, 여천 만에서 패류가 썩어 가는 것도 우리 자신이 범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미치자, 나는 스스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다.
나는 이제 옷깃을 다시 여미고 어항 앞에 두 손을 모둔 자세로 생각에 잠겨 본다. 광주천에 아름답고 싱싱한 고기떼가 미녀처럼 유영(遊泳)하면 얼마나 즐거운 광경일까? 그러면 광주는 환상의 도시가 될 것이다. 시냇물 속에 소우주가 있고 꿈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밤이면 호수 되어 달이 뜰 것이다. 이사가서 오동나무에 걸린 달을 보고 감격하여 집 값을 더 지불했다는 백낙천이 부럽지 않을 것이다. 호심(湖心)에 곱게 비치는 자신을 발견한 시민들은 한때나마 몰아지경(沒我之境)에 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도회생활의 피곤을 잊고 하루하루가 즐거울 것이며 삶은 보람찰 것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호심의 소우주를 찬탄하며 즐거운 인사를 나누리라.
광주천에서 개구쟁이들이 멱을 감고 잠수도 하며 손에 다슬기나 우렁이를 잡아 올린다면……. 우리들 주변의 냇가 어디서나 이런 신나는 광경이 예삿일처럼 된다면 만금보다 더한 보배가 아닐까?
산과 내, 아니,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 우렁이 한 마리가 모두 소중한 자연이 아니가? 자연, 이것은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없다. 임자가 없으니 우리 모두의 것이다. 자연을 잘 보존하여 말 그대로 금수강산으로 가꾸는 날, 우리는 무궁한 복을 누릴 것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의 혜택 속에서 살고 자연으로 돌아간다.'
자연보호헌장의 첫 구절이다. 이 헌장은 자연을 자연스럽게 보존하려는 국민 모두의 의지의 집약이다. 이 의지가 실현되는 날 낙원은 우리 앞에 펼쳐지리라.
아! 벌써 낙원의 씨를 싹틔우는 내 마음의 어항 속엔 달빛이 머물고 대자연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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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한국수필등단. 광주문학상. 수필집 '복만동이야기'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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