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초대 CEO 이병철 회장
이병철
삼성그룹의 창업자이다.
호는 호암(湖巖).
1926년 서울중동중학교에 입학했으나 2년 뒤 중퇴했다.
1932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했다가
1934년 중퇴한 후 귀국했다.
1982년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명예경영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 . 투기성 사업의 무용성
그는 26세에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쌀 300석 분의 토지로
도정업, 운송회사 , 토지 매입을 차례로 해나갔다.
여기서 도정업이라는 것은 벼를 사다가 껍질을 벗겨 쌀을 만드는 일을 말한다.
이 같은 사업을 하면서 이병철은 경남 일대에서 최대의 지주가 된다.
그러나 1937년 3월 터진 중일 전쟁으로 인해
일본 정부가 은행의 대출을 중단함에 따라 전답의 시세가 폭락,
은행 대출금에만 의존하던 이병철에게는 현금 2 만원과 전답 10만평만을 제외하고
모든게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 때 말한 것이 ` 3利가 있으면 3害가 있다` 이다.
`교만한 자 치고 망하지 않은 자 없다.`
그 당시 상황을 통해 얻은 경험을 통해
(1). 사업은 국내외 정세를 정확히 통찰해야 한다.
(2). 무모한 과욕을 버리고 자기 능력과 한계를 냉철히 판단해야 한다.
(3). 요행을 바라는 투기는 절대로 피해야 한다.
(4). 직관력의 연마를 중시하는 한편 제 2 , 제 3 의 대비책을 강구해야한다.
(5). 대세가 기울어 이미 실패라는 판단이 서면
깨끗이 미련을 버리고 차선의 길을 택해야 한다.
짧은 보고서에 위에 5가지 경험을 적어놓은 이유는
위와 같은 사항이 현재에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병철은 중일전쟁으로 국제 정세가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을 깨달았다면
현재는 그 당시보다 경제적인 급변은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IMF로 인해 국내 경제는 어떤 보호막도 없이 해외에 그대로 방치되기 때문이다.
요행을 바라는 투기는 주식투자, 떴다방, 복권,
일확천금을 노리라고 언론에서 조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주식투자를 강조하는 언론 때문에 많은 이들이 주식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개미투자자들 중에서 돈을 벌고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기관 과 외국인 투자자, 소수의 몇몇 대규모 자본만이 돈을 벌고 있는 것인 현실이다.
복권 같은 경우에는 언론의 행태가 더욱 심한 편이다.
20억을 벌었다고 광고하고, 언론에서 보도하고,
그런 의도가 어디에 있을까? 그것 역시 사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병철은 도정업, 운송회사, 부동산 투기를 하면서
이처럼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사업은 무익하다고 하였다.
나라를 위해서도, 국민을 위해서도,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소수의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2. 최고라는 것은 무엇일까?
최고라는 것은 삼성의 모토이기도 하다. 최고만이 살아남습니다.
최고가 되는 길! 삼성이 나아가고자 하는 길입니다.
모든 기업이 최고가 되기를 원하지만, 삼성은 원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기업이기도 하다.
그런 최고라는 개념을 심어준 인물이 바로 이병철이다.
이병철에게 최고라는 의미는 최고의 품질, 최고의 인재를 의미한다.
일종의 장인정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것. 이병철이 꿈꾸는 것이다.
평소에 이병철이 자주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노력하는 유전자는 따로 있다.
누구나 성공하기를 원하기는 하지만, 누구나 다 노력하게 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해볼 때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노력은
유전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1) 품질로서의 최고
이병철에게 최고라는 개념이 잡힌 것은
1950년 2월 도쿄를 방문했을 때 라고 한다.
뒷 길에 허름한 이발소에 별생각없이 들어가서 주인에게 말했다.
`이발일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제가 3대 째니까, 가업이 된지 이럭저럭 60년쯤 되나 봅니다.
자식 놈도 이어주었으면 합니다만...`
이병철은 사소한 대화에서 일본인들의 투철한 직업의식을 느꼈다.
삼성의 기업정신은 일본의 장인정신과 비슷하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장인정신을 일컬어 잇쇼켄메이 라고 한다.
즉, 한 가지 일에 목숨을 걸고 그 분야에서의 최고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 제일모직이라고 할 수 있다.
1954년에 설립된 제일모직이 설립된 배경은 이렇다.
당시에 사회적 분위기는 돈없는 사람들에게 양복지는 뜬구름 잡는 소리라며
욕먹기 십상이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마카오 신사가 부유함을 상징했던 그런 시절이었다.
물론,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프라다를 입고있어야 부유함을 보여진다고 생각하는 것.
물론, 명품을 선호하는 이유는 디자인, 원단, 브랜드가 주는 이미지이다.
그러나, 그 차이점이 단지 브랜드에서 오는 것이라면
브랜드의 고급성이 주는 인식의 차이만 바꾸어 놓는다면,
우리 제품도 명품이라 불리울 수 있지 않을까.
이병철도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제일모직의 브랜드를 광고하기 시작한다.
해외 유명 브랜드보다 낫다는 광고 문구를 쓰기도 하고, 직접 입기도 하고,
실제로 최고의 품질을 만들기 위해 막대한 자본과 노력을 투자하여
해외 유수의 평가 단체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이병철은 제일 제당과 제일 모직의 성공으로
전국 납세액의 4%를 내는 국내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이것은 이병철 개인만의 성공이 아니라,
마침내 한국 땅에서 외제 양복지를 몰아내고 국민 생활에 새바람을 불어 넣었으며,
연간 25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외화를 절약하게 되었다.
요새 우리 사회를 일컬어 세계화 시대라고 말을 한다.
외국계 기업들이 우리 기업들을 차지하고,
국민들은 국내 제품보다 외국 제품을 선호하는 등,
물론 이러한 과정들이 세계화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일방적인 세계화라면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세계화란 세계 각국의 특성들이 한데 뭉쳐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의 세계화는 서구 선진 몇몇 나라들의 문화만이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것 같다.
이병철의 제일모직이 한국에서도 외국 제품 못지않은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면,
우리들이 해야할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못만드는
최고 품질의 제품을 만드는 것이 우리들의 역할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