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에 내리는 눈 - 오승희
눈이나 비가 조금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무시하고 함박눈이 밤새 내린 모양입니다. TV에서는 새벽부터 폭설로 인한 교통 대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법석을 떱니다. 기상대는 오늘 오전 내내 전화통에 불이 나겠지요.
수선스런 TV와는 달리 눈이 쌓인 세상은 참 고요합니다.
건물의 옥상과 지붕 위에도 아파트 뜰에 세워 놓은 승용차 위에도 눈이 수북이 쌓였습니다. 저 멀리 검게 보이던 산도 앙상한 나무도 모두 눈옷을 도톰하게 입었습니다. 포근히 덮은 솜이불 속으로 소리란 소리는 모조리 빨려 들어간 것 같습니다. 우수를 지나서 온 눈치고는 정말 많이 왔네요. 아직도 눈은 간간이 흩날리고 있습니다. 어제 밤늦도록까지도 왁자지껄하고 휘황찬란하던 세상이 이렇게 조용해지다니요. 신기 합니다. 분노도 원망도 다툼도 설음도 불같은 정열조차도 달아오른 열기를 눈 속에 조용히 식히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포근해 보이는 세상과는 달리 바람은 매정하네요.
신작로에는 자동차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사람들도 양 팔을 조금 벌리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어 놓습니다. 아! 저기 건너편에 목발을 짚은 사람이 있네요.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걸까요. 아니면 위험해도 눈밭에 발을 디뎌보고 싶은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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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각을 다투며 살아야 하는 도시의 사람들이 주책없이 절기도 모른다며 눈을 원망합니다. 아니요, 눈이 많이 올 것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기상대를 나무라지요. 더구나 오늘은 아이들의 새 학년이 시작되는 날이거든요.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조심조심 움직이면 별 탈 없을 겁니다. 직장에 학교에 조금 지각을 해도 오늘 같은 날은 용서되지 않을까요. 약속한 일이 어긋났어도 대신 좋은 일이 또 생길 것입니다. 다급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저 눈밭을 좀 보세요. 며칠 전에 자살을 감행한 예쁜 배우아가씨 조금만 참았다가 이토록 조용하고 아름다운 설경을 보았더라면 어쩌면 마음을 바꿨을지도 모릅니다. 순간적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저도 말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 말씀을 수백 번 외워도 심난하고 서러운 마음을 다 떨어 낼 수 없어서 자주 잠을 설친답니다. 지난밤에도 형체조차 알 수 없는 무엇에 밤새 쫓기다 잠이 깨곤 했지요. 또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닌지 불안한 생각에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답니다. 하지만 밤새 소리도 없이 내린 눈은 신이 세상에 베푸는 축복인 듯합니다.
도시에서의 생활에 쌓인 눈이 반가운 것만은 아니겠으나 삼월에 온 눈이 아무리 많이 내렸다 해도 석 달 열흘 사람 발목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곧 눈은 녹아 땅속으로 스밀 것이고 땅속 깊은 곳에서는 새 생명을 준비 할 것입니다. 죽은 것 같아 보이던 나무에서는 새순이 눈을 트고 양지 바른 곳에서는 예쁜 싹들이 고개를 내 밀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으면 우리는 벙긋벙긋 웃어대는 봄꽃들을 보게 되겠지요.
그 새 눈은 그쳤군요. 저 것 보세요. 뿌연 하늘을 비집고 따뜻한 햇볕이 차가운 눈밭에 내려앉습니다. 저 너머에 봄이 와 있다고 알려주나 봐요.
오늘 아침 세상 풍경은 아름답다기보다는 경건한 모습입니다.
2005년의 봄은 이렇게 가만가만 그러면서 차근차근 내게로 다가옵니다.
2005.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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