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원의 가을 - 윤오영
구름다리를 향해 걸어가던 나는 맞은편에서 오는 금아琴兒(피천득의 호)와 만났다.
"마침 잘 만났군"
"혼자서 비원엘 가던 길이야?"
금아의 말이다. 두 그림자는 드디어 비원으로 옮겨졌다.
각기 하루의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이다. 석양은 한 자쯤 남아 있었다.
낙엽을 밟으며 누릇누릇한 수림 사이로, 약간 남아서 선연한 단풍을 본다. 만추의 빛이다. 저물어 가는 가을. 비원 안에는 사람이 적었다. 낙엽을 깔고 앉으니 푹신하고 들어간다.
한 움큼 쥐어보며,
"이효석의 산이란 참 좋은 작품이었군!"
금아도 말없이 낙엽을 쥐어 본다.
언덕길을 내려갈 때 앞서 가는 남녀 두 학생이 있었다. 우리를 돌아보며
"할아버지 이 이 꽃 좀 보세요. 봄날 같지요"
하기에 옆을 보니 양지편으로 뻗친 가지에 개나리꽃이 노랗게 맺혀 있었다.
손바닥을 꽃 밑에 대고 들여다본다. 갑자기 풀린 날씨에 잠시 핀 철 아닌 꽃이다.
초승달 같은 이 꽃, 보는 사람은 극히 적다.
다시 숲 속에 앉았다. 둘의 이야기는 지나간 옛날을 더듬었다.
창범이, 남이, 상빈이, 영빈이, 영범이, 지금은 다 어디들 있는고, 둘은 죽고 하나는 병들고 하나는 알 길이 없다.
어렸을 때 어두운 거리, 비내리는 거리를 걸으며, 울분을 터뜨리고 포부와 재주를 다투던 그리운 얼굴들이다.
금아는 깨끗하고 고요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항상 고독을 느끼는 다감한 사람이다.
"이렇게 느끼다가 가는 것이 인생인가."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대답 대신 호탕하게 웃었다.
<서상기서西床記序>에 김성탄金聖嘆의 말이 걸작이다.
"내가 언제 이 세상에 태어나지라고 청했기에 무단히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며, 이왕 태어났으면 길이 머물러나 두거나, 왜 또 잠시도 못 머무르게 그렇게 빨리 가게 하며, 또 오래 머무르지도 못하게 하면서 그 동안에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은 왜 또 이렇게 다감하게 했느냐고 조물주에게 따졌더니, 그 대답이 난들 어찌하리오, 그렇게 아니할 수가 있다면 조물주가 아닌 걸, 당신들이 제각각 나라고 하면, 어느 것이 진짜 나요"
하더라는 것이다. 이 또한 성탄대로의 실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옥류천의 물소리는 고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여기는 서울이 아니다. 고궁도 아니다.
두 사람을 위해서 잠시 베푼 만추의 한 폭이다. 이윽고 금아는 입을 열었다.
"우리가 가을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볼 수가 있을까."
나는, "앞으로 그리 길지 못한 가을이나마 또 몇 번이나 이렇게 둘이 한가하게 즐길 수 있겠소"
하고 웃었다.
그리고 소동파의 글을 외었다.
"밤에 달이 밝기에 뒷산 절에 올라갔다.
상인上人(層)도 마침 마루에서 달을 보고 있다가 반가워한다.
뜰 앞에 달빛이 고여 바다 같다.
마당가의 대나무 그림자가 어른어른 물에 뜬 마름 같다.
달빛은 어느 때나 있고 대나무 그림자도 어디나 있지만,
이 밤에 우리 둘같이 한가한 사람이 있기가 적다."
이 전편 몇 줄 안되는 글이지만 나는 세상에서 떠들어대는 <적벽부>보다 높이 평가한다.
"인생 한가한 날은 많지가 않다. 百年閒日不多時!" 인생 백년을 짧다 하지만 그 사이에 한가한 시간이란 다시 짧다. 깊은 산 고요한 절에 숨어 살아도 우수와 번뇌를 못하면 한가한 것이 아니요, 밝은 창 고요한 책상머리에 단정히 앉았어도 명리와 욕망을 버리지 못하면 한가한 것이 아니다.
심심해서 신문광고를 들고 누웠어도 시비와 울화를 안고 있으면 분망하기 짝이 없는 것이요, 피로와 권태가 이미 한가한 것이 아니다.
하물며 생활에 쫓기고 세태에 휩쓸려 한가할 겨를이 없음에서랴.
세월의 빠른 것을 한탄하고 슬퍼함은 인간 통유의 정이지만 기다림이 있으면 일각이 삼추 같고, 괴로움이 있으면 하루가 십 년이다. 옥중에서 지리한 세월을 저주하는 사람, 월급날을 손꼽아 재촉하며 초조한 사람도 있다. 진실로 한가한 사람이란 몇이나 되는가.
도연명 같은 전원 시인을 한일閒逸이라 하지만,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캐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를 읊어 본 시간은 그의 일생에서도 반드시 많지는 못했을 것이다.
위대한 사람은 시간을 창조해 나가고 범상한 사람은 시간에 실려간다.
그러나 한가한 사람이란 시간과 마주 서 있어 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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