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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연가 - 도월화

Joyfule 2012. 7. 19. 13:23

 

 겨울 연가 - 도월화  


첫사랑의 빛깔은 어떤 색일까. 차가운 칼바람 끝에도 따뜻함을 머금은 함박눈빛일까.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설원처럼 가슴 서늘해지도록 새 하얀색이 아닐까. 첫사랑의 계절은 봄이나 가을보다 오히려 순백의 겨울이라고나 할까.  

연 전에 TV드라마 '겨울 연가'가 전국을 술렁이게 하고 일본 열도까지 흔들어 놓았다.

"욘사마, 욘사마,"
지난 연말, 약간 곱슬거리는 중간 길이 머리의 대학생인 우리 작은애가 춘천 시가를 걸어가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뒤돌아보니 일본 아줌마 관광객 서너 명이 사진 한 장 눌러주라는 몸짓을 하며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지 않는가.

애틋한 첫사랑의 추억 탓일까. 요즘도 춘천의 촬영지에는 일인 손님을 태운 버스가 찾아든다. 내가 다니는 성당 앞의 작은 찻길을 건너면 '준상이네 집'이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돌면 지금은 마른 담쟁이덩굴 덮인 담이 보이는, 건평 열서너 평 정도의 한옥이다. 화면에 나왔던 피아노와 가구를 보고 드라마 장면이 떠오른다며 일본 팬들이 감격한다고 한다. 아기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도 눈에 띄고 사, 오십 대의 부인들도 생각보다 많다.

'준상이네 집'에서 몇 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소양강이 흐른다. 춘천집에 머물 때 나는 거의 매일 강변을 산책한다. 바람은 부드럽고 강물이 잔잔한 날, 강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어느 쪽을 봐도 호젓하고 평화롭다. 흰 페인트를 칠한 철제로 얼기설기 얽힌 야트막한 담장은 벗어날 수 없는 숙명처럼 언제나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얀 나무 울타리 앞의 작은 벤치도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다. 유진이(최지우 분)네 학교에 고 2때 준상이(배용준 분) 전학을 와서, 드라마 속 버스 정류장에서 처음 만난 곳이다.

무엇이 이토록 관객을 열광하게 하는가. 이제 우리나라도 사회, 문화 제반 분야에서 국가 경쟁력을 지니게 되고 외국을 향해 매혹적으로 다가서는 측면을 가진 것이 흐뭇하다. '겨울 연가'로 탤런트, 배용준은 '욘사마'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한류 열풍을 일으켰다. 혹시 일본인의 피 속에 일찍이 현해탄을 건너간 옛 우리 조상들의 유전정보가 면면히 전해 내려오는 것은 아닌가. 별별 생각이 다 들기도 한다. 나는 '겨울 연가'를 제대로 못 보아서 이번에 재방영하는 연속극을 다시 보았다.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흰 눈 같이 깨끗한 사랑에 대한 그리움일까.  하얀 칼라 여고생 교복 차림의 유진은 백합처럼 청아하고, 역시 고교 교복의 준상에게도 약간은 반항기와 우수를 띤 가운데 풋풋한 향내가 피어났다. 첫눈에 반한 건 아니지만 두 사람은 차츰 서로에게 이끌린다. 눈 내리는 호숫가에서의 어린아이가 캔디에 입술을 대어보듯 짧은 입맞춤. 그 얼마 후 준상은 유진이 기다리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 준상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유진과 친구들은 강에서 모여 자기들끼리 영결식을 치른다.  

사라지는 것은 애절하다. 눈송이가 찬란한 것은 녹아버리기 때문은 아닌가. 사철 눈이 내린다면 겨울 한 철 잠시 내리고 마는 것보다는 덜 안타까울 게다. 첫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던가.  

'...하지만, 첫사랑이 저를 다시 부르면 어떡하죠?'
10년 후, 어릴 적부터의 오랜 친구 사이인 유진과 상혁의 약혼식 날. 그 날도 눈이 내린다.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환영처럼 준상이 지나가는 것을 본 유진은 정신없이 찾아 헤매다가 예식 시간을 놓쳐 버린다.

드라마 '겨울 연가'는 작금의 영상매체가 폭력물이 난무하는데 넌더리가 난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무엇보다 '겨울 연가'가 대중을 사로잡은 것은 티 없이 맑은 감정이입에 성공한 까닭이라고 생각된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준상과 준상이를 닮았다고 느끼는 유진은 똑 같은 한 사람에게 두 번 사랑에 빠지는 체험을 한다. 우여곡절 속에 이별과 재회가 이어진다. 호수, 강, 숲이 아름다운, 춘천의 겨울 풍경이 환상적으로 펼쳐진다.  하얀 설경 속에 주인공들 출생의 비화를 배경으로 한, 차마 그칠 수 없는 펑펑 내리는 눈 같은 사랑이 애잔하게 흐른다.    

그대의 눈물이 내 영혼을 씻어 준다. 준상을 잊지 못하는 유진의 눈물 연기가 가슴 저리다. 만약 아직도 순수한 첫사랑의 기억을 다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어찌 그녀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 순수는 무디어 가는 의식을 깨우고 첨예한 직관을 지니게 해주기도 한다. 순수는 얼어붙은 겨울에도 봄바람의 설렘을 일게 해주고, 메마른 디지털 시대에도 눈꽃 같은 사랑을 피워낸다. http://ssopia7.kll.co.kr


* [창작 수필] 2008 가을 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