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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깍쟁이 - 방계은

Joyfule 2013. 12. 5. 09:09

 

 

서울깍쟁이 - 방계은 

 

  “고향이란 그 사람의 가슴에 흐르는 사랑의 원류(源流)이기도 하고, 눈물의 원천이기도 하고, 때로는 보석이 되기도 하고, 병이기도 하며, 버리려야 버려지지도 않는 모토(母土)인 것이다”라고 정완영(鄭椀永) 님은 말했다. 자랄 때 나는 고향이 없는 줄 알았다. 방학마다 학우들은 고향 간다면서 시골로 향했다. 우리는 가야할 시골이 없었으므로 형제들의 뇌리에는 그렇게 인식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서울을 삭막하고 인심이 사납고, 어쩌고 하면서 매도한다. 사실일 수도 있지만 나는 매도라고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서울만큼 모든 이들을 수용하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 외할머니는 아이 업은 조개젓장수나 두부장수는 꼭 불러들여 뜨거운 고깃국을 먹여 보내셨다. 그렇게 인정을 주고받던 곳이라고 대변하고 싶다. 고향이기 때문이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일제가 가장 많이 짓밟은 곳이고, 6․25사변에 폐허가 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본가가 있던 내수동 부근 사직공원은 태양빛이 반사되어 눈부시던 연록의 숲으로 덮여 있었다. 세검정 계곡은 깊었으며, 청계천은 맑은 물이 흘렀고, 낙산 기슭인 신설동 뒷산에는 산토끼가 뛰어 놀았다. 내 안에 보석 같은 그곳에서는 일 년에 한 번씩 산신제도 꼭 지냈었는데.
  

 여학교 때 친구들은 나를 별난 말을 잘하는 아이라고 했다. 무의식중에 나온 말투 속에 옥동집에 다녀왔다는 둥, 동간아주머니는 바느질 솜씨가 대단하시다는 둥, 사근동 아주머니가 어쨌다는 등의 이야기였던 것 같다. 친구들의 수군거리는 소리에 내성적인 나는 말을 조심했다. 그러다보니 친구도 별로 없이 조용한 아이로 사춘기를 보냈던 것 같다.


  지난번 은사님의 고희잔치에서 돌아오던 길이다. 문우들과 요즈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수도(首都) 이전이 화제에 올랐다. 여학교 때 이후 의식적으로 입에 올리지 않았던, 할머니께서는 우리 집안이 ‘우댓사람’임을 누누이 강조하셨다는 이야기를 했다. 당연히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다. 종로통(종로길)을 기준으로 궁이 있는 경복궁 방향에 사는 사람들을 우댓사람, 무교동 방향에 사는 사람들을 아래댓사람이라 불렀다고 설명을 해야 했다.  
  이제는 내가 우댓사람이라고 말해도 부담이 없다. 누가 그 속에 들어있는 속뜻을 알랴. 그런 옛말의 존재조차 알 수 없으니 부지중에 알려주고 싶어 튀어 나왔는지 모를 일이다. 서울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에 울꺽 치미는 서글픔이 있는데, 하물며 천도라는 문제를 앞에 놓고 만감이 서리는 까닭이다. 


  난지도가 쓰레기장이 되어있던 시절이다. 여학교 때 추억까지 쓰레기가 될 것처럼 되살려야한다고 장문을 썼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나뿐 아니라 서울시민의 소원이 모여 현실이 됐다. 월드컵경기장으로, 밤에는 별빛이 수(繡)를 놓는 하늘공원으로 거듭났다. 경복궁도 복원이 되었고, 청계천도 복원 중에 있다. 비록 사직공원이 반 토막이 되었고, 세검정 계곡이 간곳없지만 언젠가는 다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런데 수도 이전이란다. 고향을 떠나왔고 지켜내지 못했으니 유구무언이다. 한 나라에 수도(首都)로서의 자부심마저 잃게 생겼으니 서울못난이 가슴에 거센 바람만 훌친다.


  여러 해 전이다. 종로구청에 여학교 때 스승이 영어회화 강사로 나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나섰다. 수송초등학교 자리에 종로구청이 들어앉아 있었다. 혼인신고 하느라 본적지를 찾은 후 처음이다. 우리가 국민(초등)학교 다닐 때는 중학교 입시가 생에 진로를 가름하던 시절이다. 수송, 미동 등의 종로구에 있는 국민학교에 입학시키느라 엄마들의 치마가 열두 폭이었다. 그러던 게 엊그제 같은데 폐교라니, 격세지감이 들어 휘돌아 보았다. 낡은 청사가 그 청사에 밀착되듯이 높다랗게 서 있는 몇 그루의 나무가 지난날을 말해 주었다. 내 어머니를 비롯한 수송초등학교 출신들은 모두 어디로 떠나 버렸을까.


  나 또한 사대문 밖으로, 강남으로, 강동을 거쳐 용인까지 내려와 살고 있다. 타지 사람들은 서울로, 서울로 모여서 넘쳐나는데 정작 토박이들은 서울을 버린 셈이다. 아니 밀려난 것이다. 그 버렸다는 심정과 밀려났다는 패배감이 합쳐져서 슬픔이 되어버린 고향이다. 멀리 두고 와서야 가슴속 깊이 흐르는 서울내기의 자존심이 고개를 치켜드는 것인가. 서울집을 청산하고 내려올 때다. 집이라는 유형적인 재산보다는 서울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더욱 나를 가라앉게 했다. 고향이 주는 의미조차 헤아리지 않으며, 그 품안에 50여년을 살아왔건만 갑자기 내속이 텅빈 듯 갈피를 못 잡아 헛손질이 나왔다. 그것이 고향인가 보다.  


  지금은 서울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내가 자랄 때는 타지사람들이 토박이를 서울깍쟁이라 했다. 그러나 내 눈에는 서울못난이로 보였다. 경위(涇渭=경오) 밝아 가리기를 좋아하는 탓이지만 그 경위 밝은 것이 살아가는데 걸림돌일 때가 많았다. 생활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이 체면 지키기였으니까. 나는 자라면서 체면보다는 실리적으로 살리라 다짐했다. 육십이 머지않은 지금이다. 사람들의 눈에 보여 지는 나, 내 앞만 챙기며 살아왔으니 결국 서울깍쟁이인 셈이다.


  형제들의 마음속에는 길이 하나있다. 걷다보면 언제나 고향과 맞닿아 있는 길. 설사 천도가 된다 할지라도, 지워버리려 해야 지워버릴 수 없는 영역(領域)이다. 그러나 어찌 알겠는가. 내 모토(母土)인 서울이, 난지도 쓰레기장이 하늘공원 되었듯, 아름다운 수도 서울로 영원히 남게 될는지.                                     (2004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