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정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가 일 때문에 타지에 가셔서 집에 혼자 계실 어머니의 끼니가 걱정되어서였다. 평소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얼린 홍시도 여남은 개 챙겼다. 물러 터지기 전에 가려면 서둘러야 할 터였다.
간다고 미리 전화를 드려서인지 길 초입에 어머니가 마중을 나와 계셨다. 친정집에서 보자기를 풀어헤치며 당신께 배운 대로 담근 물김치나 나물무침에 대해 조잘거리고 있는데 ‘딩동’하고 어머니의 휴대전화에서 알림 소리가 울렸다. 확인을 해보니 마늘엑기스의 할부대금을 청구하는 문자메시지였다. 뭔가 불길한 감이 들었다. 딸의 얼굴을 흘낏 바라보던 어머니의 표정 또한 금세 굳어졌다. 풀어놓은 보자기의 물건조차도 모녀간의 불편한 심기 마냥 심드렁해 보였다.
몇 달 전, 어머니께서 공짜로 뭘 받았다며 자랑하시던 일이 생각났다. 사위 먹이라고 뿌듯하게 절반을 뚝 떼어 주시던 그 마늘엑기스? 내 미간에 의구심으로 가득 찬 주름 하나가 골 깊게 패였다. 동사무소에서 재래시장 상품권이나 정부미 같은 걸 종종 받아 오시기도 하셔서 마늘엑기스도 그런 선물인 줄로만 알았던 게 잘못이었다. 어머니께서 공짜로 받았다며 좋아하시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났지만 벌써 절반도 넘게 먹어버렸으니 물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미안해서 그러신 건지 아니면 나의 불편한 소리가 듣기 싫으셨던 건지 어머니는 마늘엑기스와 흡사한 방법으로 사들여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 전기 매트 위에 들어가 이불을 덮고 돌아누우셨다. 어머니의 전기 매트는 TV 홈쇼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0여만 원의 기능성 매트들과 겉보기에 별다를 바 없지만, 할부금을 다 갚기까지 아버지의 월급 두 달치를 고스란히 내야 했다. 늘 살갑던 무남독녀 외딸이 이렇게 열불이 나 날뛰고 있고 감싸 줄 남편도 지금은 곁에 없으니 저 매트한테서나 심란한 마음을 달래실 모양이셨다. 속상한 마음에 좀처럼 이불속에서 나오지 못하실 것이다.
예전 효도관광으로 보내드린 여행에서 노래를 부르고 그 상품으로 녹용이 들어간 한약을 받아오셨던 일이 생각났다. 한 달 뒤 고액이 적힌 청구서를 받기 전까지는 드실 때마다 어머니를 흐뭇하게 해 주던 보약이었다. 그것뿐인가. 보이스 피싱에 걸려들어 얼마 안 되는 전 재산을 다 털린 순박한 농촌 사람들 이야기는 이미 신문지상에 오르내린 지 오래라서 놀랄 만한 일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생각해보면 어머니를 탓할 일만도 아니었다. 오히려 평생 농사만 짓고 살아온 순진한 사람들을 상대로 한 약삭빠른 장사꾼들의 상술에 화가 났다. 속상한 마음만치 힘껏 대문을 쾅 닫고 나오는데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도 무거웠다. 마침 골목길에서 할머니 한 분이 공병이 실린 유모차를 끌며 지나가고 계셨다. 그 낯익은 낯섦에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내가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신호대기로 정차할 때마다 인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시장 주변을 돌아오는 길이라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였다. 휙휙 뛰는 듯이 걸어가는 세련된 중년의 여성이나 또각또각 걸음에 맞춰 생머리를 찰랑거리는 젊은 아가씨들. 그 틈에 유독 주변을 기웃거리며 걸어가는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들어왔다. 그분의 얼굴에 언뜻 친정어머니의 모습이 비쳐 한참 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똑똑한 사람들이 많은 시대, 그만큼 영악한 사람들도 많아졌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이런 세상을 무사히 살아가려면 얼마나 전투적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그들의 눈에 내 어머니 같은 사람들은 아마 먹음직스러운 홍시처럼 보였을 것이다. 얇고 연약한 껍질은 굳이 벗기지 않아도 되었을 테고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는 달콤함은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홍시가 가진 위협적인 무기라고는 간혹 한두 개 품고 있는 씨앗 정도랄까. 그것은 혀에 닿자마자 혓바닥을 뻑뻑하게 만드는 땡감에 비하면 애교스러운 방어다.
내 어머니는 처음부터 날 선 칼을 갖지도 못한 시골 사람이었다. 이젠 다 낡고 무뎌져 버린 어머니의 순진한 창과 방패 대신에 내가 좀 더 열심히 어머니를 보호해야 하는데……. 문득 어머니를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눕게 한 건 공짜인 줄 알았던 마늘엑기스의 할부대금 청구서가 아니라 딸에게서 받은 상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퍼렇게 날 선 칼로 내가 어머니의 가슴에 새로운 생채기를 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후회의 눈물이 아롱졌다.
불현듯 친정집 부엌에서 녹아 흐무러지고 있을 홍시 생각이 났다. 금방 터질 것 같이 위태한 몸을 보존하려 얼려놓은 홍시는 안쓰럽고 약하기만 한 친정어머니를 닮아있었다. 핸들을 꺾어 차를 돌렸다. 친정집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엄마!” 하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집 안은 고요했다. 가만히 안방 문을 열어보니 어머니는 아직도 이불 속에 누워계셨다. 내가 너무 늦진 않았구나! 부려놓은 보자기 위에 홍시가 하얗게 살얼음을 입고 있었다. 나는 적당히 말캉해진 홍시 하나를 접시에 받쳐 들고 안방으로 조용히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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