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의 어머니 박또라, 그 시대의 여인들
김활란은 제물포 배다리마을(현재 인천시 우각동)에서 김진연(金鎭淵)·박또라(朴萄羅) 씨의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1899년이 기해년이었으므로 부모는 기득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여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름이 없던 시절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딸들에게도 이름을 지어 줄 만큼 개화한 분들이었다. 그가 일곱 살 때 인천의 내리교회에서
온 가족이 세례를 받으면서 어머니는 또라, 딸들은 엘렌·마리온·헬렌 등의 세례명을 갖게 됐고, 아버지가 세례명에 한자를 달아 애란·활란 등의 새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래서 그는 기득·헬렌·활란 등 3개의 이름을 갖게 됐다.
'또 하나의 달'이란 뜻의 우월(又月)은 형부인 김달하(金達何)씨가 지어 준 아호다.
평북 의주에서 농사를 짓던 김진연씨가 인천으로 이주한 것은 새 삶을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쇄국 정책을 고집하던 대원군이 1873년 실각하자 고종은 3년 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고, 1882년에는 미국·영국·독일과 수호 조약을 맺었다. 부산·원산·인천이 잇달아 개항하고, 해외 문물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 항구들은 활기가 넘치는 기회의 땅이 되었다.
김진연씨는 인천의 큰 상점에서 경리일과 창고업을 돕고 있었다.
어머니 박씨도 평북 의주 태생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노름 빚에 몰린 아버지는 열 살이 갓 넘은 딸을 부잣집에 팔아 넘겼다. 그가 팔려 가던 날 베틀에 앉아 베를 짜고 있던 그의 어머니는 갑자기 들이닥친 사내들이 발버둥치는 어린 딸을 끌고 가 버리자 베를 모두 찢어 버리고, 그 길로 자리에 누워 애통해하다가 곧 세상을 떠났다.
가난과 무지가 부른 비극이었다.
팔려 간 달이 6월이어서 그는 '유월이'라고 불렸다. 총명하고 인물이 환해서 '함박꽃'이란 별명도 얻었다. 틈틈이 글을 배운 그는 그 댁 마님의 시중을 들면서 온갖 옛이야기 책을 읽어 드리곤 했다. 그가 열여덟살 때 주인 영감은 그를 소실로 삼았다. 딸을 둘 낳고 의식주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는 차츰 사람의 도리를 생각하게 됐다. 소실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결심이 서자 그는 붙잡는 주인집 사람들을 뿌리치고 어린 두 딸과 함께 그 집을 나왔다. 생계가 막막했으나 그의 결심을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그 때 김진연 씨는 첫 아내와 사별한 후 아들 하나와 인천에서 살고 있었다. 고향 사람의 중매로 그들은 혼인하여 2남 3녀를 낳았다. 전실 아이들을 합쳐 모두 3남 5녀를 거느린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떳떳한 새 삶이었다.
미신을 좋아하여 길흉화복을 귀신에게 의지하던 어머니는 어느 날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가진 전도 부인 김씨를 만났다. 그가 기독교를 전도하자 어머니는 차츰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하나님 안에서 그의 과거와 미래는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 옳다고 판단하면 과감하게 받아들이는 결단력을 가졌던 그는 남편을 설득하여 온 가족을 이끌고 세례를 받았다.
그는 막내딸을 특히 사랑했고 "헬렌을 하나님께 바치오니 하나님께 합당한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늘 기도했다.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면서 '하나님께 합당한 그릇'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어린 헬렌의 가슴을 채웠다.
여자를 가문의 종속물로 보는 유교 전통 아래서도 조선조 양반 계급의 여인들은
안주인으로서 당당한 지위를 가졌고, 높은 규방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이어져 내려오는 한 집안의 가풍을 유지하고, 여인으로 살아가는 법도와 예절을 높이 세우고, 학문과 서화를 배워 깊은 경지에 이르기도 했다.
기생들조차 기예와 시문의 풍류를 즐길 줄 알았고, 빼어난 시와 그림들을 남겼다.
그러나 아래 계층의 여자들은 고단한 운명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가난과 무지, 야만과 폭력이 삶을 억누르고 있었다.
열네살의 김활란은 이화학당 기도실에서 밤새워 기도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처절한 울부짖음과 함께
"저 소리가 들리느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저 소리는 한국 여성들의 아우성이다. 저들을 구해야 한다. 그것이 너의 일이다"라고 그 음성은 말했다.
"나는 땀에 흠뻑 젖어 흐느껴 울면서 뚜렷한 목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그는 훗날 고백했다. 그의 생에서 결정적인 전기가 된 그 계시의 경험, 어둠 속에서 들려온 소리는 어머니와 그 시대 여인들의 한맺힌 울부짖음이었다.
가난 속에서 하숙을 치고 남의 집 일을 도우면서도 어머니는 자녀들을 학교에 보냈고, 특히 세 딸을 이화학당에 보내면서 그들이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을 빌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딸들에게 "오늘은 무엇을 배웠느냐"라고 묻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양반 계급 출신이 아니었던 그는 강한 생명력과 자유로운 개척 정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그는 일제시대에도 나라를 위한 기도를 잊지 않았고, 고리짝 깊숙이 태극기를 간직했다가 해방되던 날 마을 젊은이들에게 내주어 태극기를 그릴 수 있게 했던 여장부였다. 여자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꿈을 꾸며 역경 속에서도 딸들을 훌륭하게 키웠던 한국의 어머니, 박또라 여사는 1954년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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