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데이비스’ 부산선교의 첫 순교자
부산장신대학교 부산경남교회사연구소(소장 탁지일 교수)는 부산의 초기 상주 선교사들에 대한 연구를 3년 기획으로 진행해오고 있다. 부산경남지역에 첫 복음의 씨앗을 뿌린 캐나다교회의 게일과 하디(2004년), 호주교회의 데이비스(2005년), 미국교회의 베어드(2006년)에 관한 연구를 통해 부산경남지역 초기 선교역사를 재조명함으로써 지역복음화의 교회사적 의미와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편집자)
이 글을 쓴 John Brown(변조은) 목사는 호주연합교회소속으로, Melbourne 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호주장로교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한국에서 선교사로 12년 동안 (1960.9~1972.7) 마산을 중심으로 사역하는 한편, 부산장신대, 장신대 등에서 신학교육(구약학)에 힘썼다. 귀국 후 다양한 교회사역과 에큐메니칼운동에 관여하면서, 호주연합교회 선교부 총무를 역임하였다. 1978년에 계명대학교와 2001년에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학위를 수여 받았으며, 1992년에는 호주 정부로부터 선교와 국제관계에 대한 공헌을 기리는 호주최고훈장 수여받았다. 현재 호주 캔버라에 거주하며 경남지역에서의 호주선교관련 사료들을 수집, 연구하고 있다.
요셉 헨리 데이비스 (Joseph Henry Davies, 1856-90) 목사는 1856년 3월 22일 뉴질랜드의 완가나리(Wanganari)에서 태어났다. 데이비스의 가족은 1860년 호주 멜본으로 이주하였고, 그의 부친은 그곳에서 변호사로 성공하였다. 그러나 데이비스가 12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데이비스는 13명의 자녀가 있는 대가족의 가장이 되었다. 데이비스는 11살 때부터 아버지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근무하였기에, 아버지의 동료들은 데이비스가 대학입학시험에 합격하면 그를 고용하기로 약속하였다. 데이비스는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15살 때에 대학입학시험을 합격하였다.
데이비스의 누이인 사라는 남인도의 엘로르(Ellore)에서 성공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소속의 선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데이비스는 사역자가 부족하다는 그의 누이의 편지를 받고, 20세의 데이비스는 직장을 그만두고 인도 선교사로 갔다. 그는 플리머스형제단이 생활비와 기도로써 그를 후원해 줄 것을 기대하였으나, 이러한 후원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이로 인해, 데이비스는 인도에서의 선교사역을 그다지 만족해하지는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여러 문제들이 노출되었다. 결국 그는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약 일년 만에 다시 멜본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호주로 돌아온 데이비스는 인도에 있는 동안 그를 후원하지 않았던 플리머스형제단과 사이가 멀어졌고, 다양한 교파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였다. 이따금씩 설교를 하였으며, 성공회 소속 목회자들, 특히 컬필드의 성마리아 성공회교회의 메카트니(H. B. Macartney)목사와 투랙 장로교회의 유잉(J. F. Ewing)목사와 가까이 교제하였다.
데이비스는 이때에 멜본대학교 문리대에 입학하여 고전학을 공부하였으며 1881년 3월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883년에는 석사 학위를 받아 그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어학에 있어서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자기의 동생을 포함한 학생들의 개인교사로 일하면서 공부하였는데, 이 경험을 바탕으로 데이비스는 사립학교의 설립을 결심한다.
데이비스는 사립학교인 컬필드그래머학교(Caulfield Grammar School)를 세우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그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교사로 부르시고 계시다는 것을 받아드리고 있었지만, 가족의 생계와 관련하여 사립학교를 운영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그는 학교운영을 통해 많은 학생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데이비스는 25살 때에 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하지만 데이비스는 그가 교장으로 있었던 7년의 기간 동안에 이 일이 그의 평생의 사역이라고 인정하지 않은 것 같다. 그의 일기에는 계속적인 고민이 보인다. 데이비스가 설립한 이 학교는 후에 명문이 되었지만, 설립당시의 학생수는 고작 12명에 불과하였으나, 6년 만에 학생수가 96명으로 증가하였고, 그 중 32명이 기숙사에 살았다.
데이비스가 설립한 학교는 점점 성장하였고 학교의 지명도도 차츰 높아졌지만, 데이비스는 학교를 팔고 인도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동생 마리아는 데이비스의 생각에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데이비스가 먼저 가장으로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데이비스는 1887년까지 학교를 계속 운영하면서 주말에는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전도하였다.
하지만 동생들이 대학교를 졸업하고 그리고 어머니를 잃은 후, 데이비스는 그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학교를 잘 팔기만하면 인도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드디어 1888년 4월 28일에 데이비스는 학교를 정리하였고 그해 8월 성공회의 바넷(Barnett) 목사에게 교장자리를 맡기고 학교를 떠났다.
데이비스는 가능한 인도에 속히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성공회선교부는 데이비스가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 그를 인도에 파송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성공회 멜본 교구의 감독은 목사안수를 받기위해서는 6개월 동안 교구내에서 디콘으로 일하기를 원하였다. 하지만 데이비스는 가능한 한 곧 떠나기를 원하였다.
마침 중국에서 사역하던 성공회선교부 총무 월프목사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도착한 해인, 1884년 11월에 한국을 시찰하려고 방문하였는데, 이 방문을 통해 그는 조선인들을 전도할 필요성과 가능성을 본다. 그는 중국 신도 가운데서 한국에 보낼 지원자를 찾았으나 선교부가 그들의 후원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월프목사는 중국교인들과 호주친구들의 후원을 받아, 1885년 11월에 전도사 두 사람을 부산에 파송하였다. 1887년 가을에 월프목사가 다시 부산 상황을 시찰하려고 갔는데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있는 학자 몇 사람을 만났지만 아직 기독교인은 없었다. 그 이듬해 중국에 주둔하는 성공회의 말틴(J. Martin)선교사가 부산에 갔는데 이때 기독교에 관심을 보이는 50-60명을 만났다고 하였다.
1887년에 월프목사가 시찰한 후에 호주에 선교사를 요청하는 감동적인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월프목사는 부산선교를 간청하였다. 컬필드교회의 메카트니목사가 발행하는 월간 선교지 〈국내와 해외 선교사〉에 월프목사의 편지가 실렸는데, 데이비스가 이 편지를 읽고 감동을 받고 부산선교를 자원하게 된다. 그는 그 신청이유에 대해, 첫째, 인도보다 한국에서 전도하는 일이 더 긴급한 것 같고, 둘째, 인도의 기후보다 한국 기후가 자기의 건강상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셋째, 월프목사가 특히 호주 선교사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데이비스가 신청하자 성공회선교부는 안수 받은 목사만이 선교사로 파송될 수 있다고 답변하여, 데이비스가 한국으로 가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데이비스는 미국장로교회가 한국에 선교회를 설립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선교회를 통해 한국에 선교사로 갈 수 있는지 알아보게 되었다. 그는 친구인 투랙 장로교회의 유잉목사와 상의하였는데, 유잉목사는 그에게 장로교회의 목사안수를 받고 호주빅토리아장로교회에 선교사 파송청원을 하도록 권하였다.
빅토리아주 청년연합회가 데이비스의 후원을 보증하였고, 그 조건으로 빅토리아장로교회는 조선에서 선교를 시작하기로 결의하게 되었다. 1888년 8월에 데이비스는 영국 에딘버러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그는 1889년 5월에 돌아와 목사고시를 합격하여 노회는 1889년 8월 5일에 그를 안수하게 되었다. 8월 17일에 성도 500여명이 멜본 스코츠교회(Scots‘ Church)에 모여 데이비스목사와 그의 누이 마리아를 조선의 선교사로 파송하는 예배를 드렸다. 데이비스는 다음과 같이 이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가장 큰 기쁨 가운데 선교사로 파송된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 두렵고 겁도 났지만 감동적인 예배였다. 우리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우리의 사역이 실패할 수 있겠는가?
데이비스는 그의 누이 마리아와 함께 8월 21일에 멜본을 떠나 28일 시드니에서 배편으로 조선을 향해 떠났다. 데이비스는 1889년 10월 4일에 제물포(지금 인천) 항구에 도착하였는데, 감리교 선교사 존스(George Heber Jones)목사가 그를 마중하였다. 그들은 10월 5일 오전 8시에 말을 타고 오후 4시 경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에서 데이비스는 비슷한 시기에 도착한 선교사 20여명을 만났다. 그는 도착한 다음 날 선교사와 외국인과 같이 예배를 드렸고, 또한 한국어예배에도 참석하였다.
그로부터 다섯 달 동안 데이비스는 가정교사를 두고 매일 오전에 한국말을 공부하였다. 오후와 주말에는 원두우(Underwood)목사 내외분이나 의사 헤론(Heron)이나 감리교선교사 올린거(Ohlinger)목사와 함께 부근 동네나 성밖의 마을에 걸어 나갔다. 때로는 서전도사와 같이 나갔다 (서전도사란 서상윤 선생이나 그의 동생 서경조 전도사를 말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런 경우에 서전도사가 전도하든지, 아니면 데이비스목사가 말씀을 전하고 서전도사가 통역해 주었다. 그들이 이렇게 다닐 때에 마리아는 가정집에 출입할 수 있었으나 데이비스는 예의상 들어가지 못하였다. 마리아는 여성을 자유롭게 상대할 수 있었다. 데이비스가 서울에 있는 동안 말을 이용하거나 혹은 도보로 서울 인근지역이나 수원까지 내려가 만나는 조선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복음을 전했다. 그는 한국말은 놀라운 정도로 빨리 늘어갔다.
1890년 3월에 데이비스는 선교지를 물색하기위해 부산까지 시찰하기로 하였다. 그는 부산에 거주하고 있던 토론토 YMCA에서 파송한 선교사인 제임스 게일(J. S. Gale)목사에게 연락하고, 1890년 3월 14일에 데이비스는 그의 선생인 영생원(일기의 글씨를 정확하게 알아보기 힘들다)과 함께 자기의 짐과 팔려는 책자와 전도지를 말에 싣고 부산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1881년 7월 24일 그의 일기에는, 인도로 돌아가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했던 것처럼, 도보로 각 마을을 다니며 전도하기로 결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데이비스는 인도가 아닌 한국에서 그와 같은 사역을 감당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데이비스 일행은 3월 15일 수원을 거쳐 20일에 공주와 전라남북도를 거쳐, 26일에 남원과 30일에 하동을 거쳐 31일에 사천에 도착하였다.
데이비스는 여행을 하면서 마가복음서 등의 책자를 많이 팔았으며, 서툰 한국어로 복음전하기를 쉬지 않았다. 도보여행의 첫 두 주일 동안에 그는 잘 지냈지만, 3월 31일에 사천읍에 도착하였을 때 그 지방관리들의 무례한 대접을 받았다. 건강은 점점 약해졌고, 드디어 데이비스는 4월 4일 부산에 도착하였고, 다음날인 4월 5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마지막 순간을 게일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Korean Sketches》, p.249.
비가 많이 오는 오후에 어떤 일군이 나에게 쪽지를 갖다 주었는데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었다. “바로 와 주십시오! J. H. Davies.” 나는 우리집에서 약 5리 정도 떨어져 있는 여관에서 그를 발견했다. 그는 햇볕에 좀 그을리고, 도보여행으로 몸은 지쳐있었으나, 상태가 아주 안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그와 같이 온 일군들이 삯을 더 달라며 그를 괴롭히고 있어서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데이비스는 내 팔에 기대어 우리집까지 걸어왔고, 내 침대에 뉘어 쉴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일본인 의사는 데이비스의 병을 천연두라고 진단하였다. 이선생과 나는 밤새 간호를 하였다. 다음날 정오경 폐렴 증세가 나타나자 의사는 데이비스가 곧 죽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데이비스는 그 때까지도 의식이 있어 나에게 말을 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오후 한 시경에 평안한 모습으로 하나님 곁으로 갔다. 그 날은 부활 주간 토요일 1890년 4월 5일이었다. 우리가 그의 시신을 산기슭에 있는 외국인 묘지에 매장하였다. (게일은 다음날 데이비스의 누이 마리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일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그 편지가 Edith A. Kerr, 《The Australian Presbyterian Mission in Korea 1889-1941》, 174-75에 기록되어 있다.)
데이비스는 부산 복병산에 묻혔고, 그의 묘비에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 죽는 것도 유익하다 (To Live Christ To Die Gain)”라고 새겼다. 《초량교회 100년사》, 54. 데이비스는 천연두 예방접종을 멜본에서 할 수 있었으나, 하루라도 빨리 한국에 가려는 마음에 접종을 하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데이비스는 조선에 6개월을 사는 동안에 매우 깊은 인상을 남기었다. 원두우(Underwood) 는 데이비스에 대하여, “열렬하며 타고난 재능이 있으며 성인이고 한국에 온 가장 귀중한 선교사 가운데 하나였다.”고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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