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의 새소리 - 구 활
새소리가 숲을 키운다. 옛날에는 나무와 풀꽃들이 저절로 자라 숲을 이루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 게 아니었다. 과학을 배우고 보니 숲은 가꾸는 이의 손길보다는 하늘에 순응하면서 자급자족하는 힘으로 스스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다.
봄이 되면 벗은 몸으로 겨울을 인내하던 나무들이 일제히 새순을 피운다. 다시 겨울이 오면 나무들은 지난해에 그랬던 것처럼 무성한 잎새들을 떨궈내고 알몸으로 의연히 매운 바람 앞에 나선다. 그래서 동그라미 하나 나이테를 그리며 젊어가기도 하고 늙어가기도 한다.
가지치기를 하지 못한 숲은 스스로 주거 공간을 넓히기 위해 산불을 일으키고, 나뭇잎이 떨어져 거름이 되게 하고, 버들치를 살리려고 산사태를 나게 하여 계곡을 깊게 판다. 이런 모든 것들이 숲이 하늘을 따르며 살아가는 존재 방식인 것을.
그런데 그 게 아니었다. 문학 공부를 시작하고부터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문학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상위 개념이란 걸 아무도 모르게 가르쳐 주었다. 숲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 이런 일련의 과학들이 숲을 살찌게 하는 것 같지만 정작 눈으로 보고도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 실제 숲을 가꾸고 있다는 사실이다.
숲은 소리가 지배한다.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하나님의 음성이 변조된 이런 맑은 소리가 곧 숲의 주인이다. 하나님이 너무 바쁘셔서 대신에 어머니를 이 세상에 보냈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 바쁨이 풀리지 않아 어머니 대신에 새들을 숲으로 보내 도시의 거리에 패트롤카가 돌아다니듯 숲의 여기저기를 보살피게 하신 것 같다. 그러니까 새소리가 주인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이 숲의 주인인 것을.
나는 새소리를 좋아하고 사랑한다. 산행을 하다가도 새소리가 들리면 두 귀를 소리 방향에 고정시켜 모든 잡음을 차단하고 오로지 새소리만 듣는다. 새소리는 내게 있어 육체와 영혼이 동시에 쉴 수 있는 강 같은 평화와 그림 속의 여백과 같은 여유를 준다.
능선에 오르려면 아직 멀었는데 베낭을 벗고 땀을 훔치면서 듣는 그 새소리의 청량감이란... 하나님의 음성? 구약 성서 속의 아브라함이 산양 대신 아들 이삭을 제물로 하나님에게 번제를 드리려 할 때 사자를 통해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 같은 소리를 나는 산에 오를 때마다 새소리 통역으로 듣는다.
"산행이 힘들제. 세상사는 일이 괴롭고 외롭제." 나는 산에서 새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된다. "괜찮심더, 견딜만 합니더." 하나님은 이삭의 결박을 풀게 하고 대신 뿔이 수풀에 묶여 있는 산양을 제물로 주신 것 같이 네게도 곧 무슨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다.
힘든 산행 길에 자주 듣는 "쀼어 쀼어..."하고 우는 검은 등 뻐꾸기 소리, 낡은 탈곡기 소리 같은 딱다구리 소리, 그리고 실직 후 아침 산책길에 동무가 되어 준 쩌쩌구새 소리, 동강 제장리 강변에서 밤새도록 '실카장?('싫컷'의 고어) 들었던 "비오 비오..."하며 우는 비오새의 가슴 앓는 구성진 소리, 나는 그런 소리들을 사랑하며 그리워한다.
동물농장이나 식물을 키우는 농원에서도 그들이 잘 자라라고 음악을 들려준다고 한다. 그것도 뽕짝이나 랩 뮤직이 아닌 클래식 음악을... 하나님은 그 옛날 태고적부터 숲에서 산새들을 길러 나무와 풀꽃들에게 노래 소리를 들려주시던 것을 인간들은 이제 겨우 알아차리고 농장에 대형 스피커를 설치하고 있으니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숲에는 안토니오 비발디의 바이얼린 협주곡 '사계'와 드 보르 작의 '신세계'와 같은 멋진 음악들이 어제도 연주되었고 내일도 변함없는 공연을 계속할 것이다.
내 고향 개울 건너 진자산 덤 밑에는 소쩍새 한 쌍이 살고 있었다. 어머니가 항상 걱정하시던 논에 물이 떨어지는 한 더위 때 이들 부부는 더 애닯게 울어댔다. 어린 내 귀에는 소쩍새의 "소쩍 소쩍"하고 우는소리가 "홋또 홋또"하고 우는 것처럼 들렸다.
자규의 피를 말리는 "소쩍"소리가 서른 초반에 청상이 된 어머니의 외로운 가슴에 피멍을 맺히게 했을 것이다. 여름밤에 소쩍새 우는소리가 들리면 어머니는 "저 놈의 새가 우리 논에 물을 말리네"라고 중얼거리셨다. 표현이야 '우리 논에 물'이었지만 알고 보면 지아비 없는 설움이 불러내는 '내 눈의 눈물'이 아니었을까. 가련한 어머니.
초등학교 시절 어느 하루는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는 소쩍새를 잡으러 친구 여럿과 덤으로 갔다. 덤은 직벽이었으나 자란 풀들이 많아 중간까지는 무난히 내려 갈 수 있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소쩍새의 둥지는 찾을 수가 없었고 올라 올 길이 막연했다. 바둥거리며 풀을 잡고 한발 올라서면 풀뿌리가 뽑혀 곧장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았다. 앞이 캄캄하여 훌쩍이고 있으니 같이 간 친구들이 바로 옆 외딴집에서 지게에 묶인 줄을 풀어와 내려 주는 바람에 가까스로 기어올라 온 아찔한 추억이 아련하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소쩍새를 싫어했다. 소쩍새는 괜히 우리 논에 물을 말릴 것 같았고 어머니를 울게 만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구십 년대 초 가족을 떠나 혼자 안동 근무를 이 년쯤 할 때였다. 퇴근 후 안동호에 밤낚시를 열흘쯤 계속했다. 안동호는 소쩍새 울음소리의 천국이었다. 낚시를 하는 재미 보다 어머니의 새인 소쩍새의 우는소리를 듣는 것이 너무 좋아 꼬박 밤을 새운 적이 있다. 여러 마리가 부르는 '소쩍 합창'은 논에 물을 말리지도 않았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눈물샘을 더 이상 자극하지 않았다.
소쩍새 우는 소리가 막연하게 그립던 참에 지난 여름 '참길 소록 봉사대'를 따라 소록도에서 며칠을 보낸 적이 있다. 소록도에 살고 있는 환자들은 소쩍새가 울면 누군가가 죽어 나간다고 믿고 있었다. 소록도 소쩍새는 하루 밤도 울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구북리 화장터엔 하루도 흰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러니까 숲을 키우는 소쩍새 소리가 소록도 사람들의 영혼까지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소록에 가서 비로소 알았다. 소록도 소쩍새는 하나님의 음성을 그대로 전하고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앞산과 뒷산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각기 다른 새들의 소리로 변성되어 숲을 지키고 있다. 숲은 정말 새소리가 가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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