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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위안부 할머니의 못 이룬 소원/ 황경춘

Joyfule 2011. 2. 24. 11:02

www.freecolumn.co.kr

위안부 할머니의 못 이룬 소원

2011.02.21


설 연휴가 끝나자 배달된 신문에 또 한 분의 전 일본군 종군위안부가 돌아가셨다는  짤막한 가슴 아픈 기사가 있었습니다. 91세의 박분이 할머니는 그렇게 바라던 일본정부의 공식 사과를 끝내 받지 못한 채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인 설날에 한많은 일생을 마쳤습니다.

기자로 일하고 있을 때부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특히 이번 박 할머니 죽음에 마음이 끌린 것은  전 일본군 고위 장성 한 사람이 ‘위안소’에 관해 전시 중에 한 발언이 바로 얼마 전 일본 잡지에 실렸기 때문입니다.

종군위안부를 고용한 소위 군 위안소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 입장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인들의 돈벌이 시설이지 일본 정부나 군이 그 운영에 관여한 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일본 잡지의 위안소 이야기 주인공은 일본 전 육군대장 이마무라 히토시(今村 均)였습니다. 그는 사리사욕과 권력을 추구한 많은 구 일본군 지도자와는 달리 고지식한 군인정신으로 전후 일본 점령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까지 감동시킨 전설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육군중장으로 교육총감 본부장이라는 일본군 정신무장을 책임지는 중요 직책을 맡고 있을 때의 이야기 한 토막이 일본 잡지 분게이�주(文藝春秋)에 이렇게 보도되었습니다.

<어느 날 시라네(白根) 중위는 이마무라 장군에게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다. “각하는 사단장 시절, 숙사의 당번병에게 위안소에 왜 안 가는가, 가보라고 명령했다고 들었습니다.” 장군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명령은 하지 않았지만, 가보도록 하라, 왜 안 가느냐고 말한 적은 있다. 안 가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원래 위안부와 접촉하는 것을 기피하는 자도 있고, 경제적인 이유도 있다. 후방에서는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있지만 전쟁터에서는 그럴 수 없다. 바른 정신을 유지하는 데에도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안소가 필요하다. 인간이기를 계속하기 위해서. 글쎄 나는 위안소라는 이름은 싫지만... 외국 같이 특수간호부대(看護婦隊) 같은 이름으로 하는 게 좋다고는 생각하지만...”>

이 이야기는 동경의 케이오(慶應)대학 교수이며 문예비평가인 후쿠다 카즈야(福田和也) 씨가 일본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이 월간 종합지에 6년째 쓰고 있는 '쇼와텐노‘(昭和天皇)라는 역사기록 연재물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후쿠다 교수는 두 달 전 같은 연재물에서 중일전쟁 당시 이 잡지 편집기자가 종군체험 기사를 쓰기 위해 만주에 출장 가 목격한 이런 대목도 소개했습니다. “석가장(石家莊, 지명)을 지나서부터는 아직 군용열차만이 운행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내가 탄 열차 안에는 조선의 종군위안부 여러 명도 타고 있었다. 그들은 인조견(人造絹)으로 된 반짝반짝하는 유별나게 빨간 색깔의 일본 옷을 입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의 비인도적 처사의 대표적 사례로 전후 국제여론의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종군위안부 문제와 중국 난징(南京) 대학살 사건입니다. 일본 국내에서는 여론이 극단적으로 양분되어 있어, 관련된 사회단체를 제외하고는 일반인이 이 두 문제에 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사항같이 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 가운데 후쿠다 교수가 두 달 사이에 두 번이나 종군위안부를 언급했다는 사실로 일부 극우 단체가 평소 그를 심하게 매도하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문예비평가로서의 후쿠다 교수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앞 다투며 모셔가는 확고한 인기를 가지고 있는 반면, 일부 극우 국수주의자들은 그를 ‘코리아계 반국가 반민족' 작가의 하나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재일교포 여류작가 유미리(柳美里) 씨와 한때 교분이 있기는 했지만 후쿠다 교수가 교포 출신이라는 기록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파 문필가로 알려져 있는 후쿠다 교수가 일본정부가 완강히 개입을 부인하는 위안부 문제를 인기 있는 연재물 ‘쇼와텐노’ 속에서 두 번이나, 그것도 아주 최근에, 언급했다는 사실 자체는 그의 작가로서의 지위를 고려할 때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저는 보았습니다.

이마무라 장군의 위안부에 관련된 발언은 극히 함축성 있는 내용으로, 특히 그의 부하와의 이 문답이 오랜 전쟁으로 문란해진 일본군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새로운 윤리강령 ‘전진훈’(戰陣訓)을 작성하는 작업 도중에 있었다는 점이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죽음으로 포로가 되는 모욕을 피하라”와 같은 강렬한 호국충성 선동으로 일관된 이 전진훈은 패전을 앞둔 여러 전지에서의 일본군의 옥쇄전술(玉碎戰術)이나 ‘카미카제’(神風)특공 작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제2차 대전 때 인도네시아 라바울에 주둔한 이마무라 대장은 당시 화란(네델란드)의 식민지였던 그곳 주민들의 독립운동을 도와 민심을 얻어, 맥아더 원수 휘하의 막강한 연합군의 화력도 라바울 일본 진지는 공략하지 못한 채 전쟁이 끝났습니다. 전후 연합군 군사재판에서 10년 금고형을 받아 동경의 시설 좋은 스가모(巢鴨)형무소에서 복역을 시작한 그는 인도네시아 현지의 환경이 나쁜 형무소에서 복역하는 옛 부하들과 같이 있게 해달라고 맥아더 원수에 탄원하여 맥아더 원수를 감동시켰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남방에서 형기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그는 넓은 자기 집 정원 한구석에 쪽방을 짓고 거기서 82세의 생을 마칠 때까지 일반사회와 단절된 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박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생존 위안부 수는 75명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그들 대부분은 일본통치 말기에 돈벌이 시켜준다는 꼬임에 빠지거나 당국에 의한 강제 징발로 종군위안부라는 수렁에 빠진 전쟁 희생자입니다. 한때 그들을 ‘정신대’(挺身隊) 할머니라 부른 것도 일제가 동원령으로 징발한 여성으로 ‘여자근로정신대’를 조직했기 때문입니다.

마침 지난 주, 개인 자격이라고는 하지만 일본의 법무장관을 지낸 분이 한국 전 법무장관의 안내로 서울 근교에 있는 이 할머니들을 위한 ‘나눔의 집’을 위로 방문하였습니다. 안내를 한 김성호 전 법무장관은 “사죄와 보상을 받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고 하는 할머니들에게 “사죄를 받을 때까지 오래 건강하게 사셔야지요”라고 위로했답니다. 과연 그런 날이 오려는지 궁금합니다. 이들과 그의 지지자들은 종군위안부의 명예회복을 위해 근 20년 동안 매주 수요일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어왔습니다. 큰 물질적 보상이 아니고 떳떳한 명예회복을 원하는 게 그들의 소원입니다.  할머니들이 한 명이라도 더 건강하게 살아계실 동안에 그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필자소개

황경춘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역임

출처 : 삼덕동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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