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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사회 멍들게 하는 '들쭉날쭉' 진단서

Joyfule 2013. 7. 10. 09:56

 

[김철중의 동서남북] 신뢰사회 멍들게 하는 '들쭉날쭉' 진단서

 

조선일보 | 김철중 의학전문기자 | 입력 2013.07.05 03:21 | 수정 2013.07.05 14:03

 

서울의 유명 대학병원 재활의학과 교수는 환자 한 명의 상태를 놓고 해석이 너무나 다른 진단서 두 장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환자는 6개월 전 퇴근길에 차를 몰고 가다 교통사고를 당한 30대 후반 회사원이다. 사고 후 찍은 척추 MRI(자기공명영상)에서 이른바 '디스크'가 발견됐다. 환자는 그전에 MRI를 찍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디스크가 원래 있던 것인지 교통사고로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환자는 사고 후 요통을 호소하며 계속 치료를 받아왔다. 하지만 가해자 측 보험회사와 보상금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법적 분쟁이 생겼고, 대학병원 교수에게 환자 상태에 대한 판정 의뢰가 온 것이다.

↑ [조선일보]김철중 의학전문기자

가해자 측 보험회사가 가져온 의사 진단서에는 척추에 퇴행성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아 환자의 요통은 원래 가지고 있던 디스크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교통사고에 의한 증세 악화는 미약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환자의 요통에 교통사고가 차지하는 비율은 30%라고 봤다. 이대로라면 보험회사가 부담하는 보상금 액수는 확 준다. 반면 피해자 측이 가져온 의사 진단서에는 디스크가 이번 사고로 발생했거나 크게 악화했다고 보고 요통 발생 원인의 70%는 교통사고라고 판정했다. 동일 환자를 놓고 진단서 내용이 40%포인트나 차이 나는 것이다.

의료 현장에서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사고로 보상을 받아야 하거나 다툼에서 가해자를 압박해야 할 측은 질병이나 상해 상태를 부풀린 의사 진단서를 어디선가 쉽게 끊어 온다. 살짝 밀쳐도 전치 2주고, 멱살만 잡혀도 3주 요양 가료 진단이 나온다. 가능한 한 보상금 액수를 줄여야 수익이 남는 보험회사들은 장애 후유증이 적게 산정된 의사 진단서를 들고 다닌다. 보험회사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진단서를 잘 끊어 주는 의사들을 '자문 의사'라는 타이틀로 관리하기도 한다. 진단서가 정치적 입장에 따라 진영 논리를 내세우는 성명서도 아닌데, 입맛대로 나오는 의사 진단서가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다.

무기징역을 받은 '청부살인 사모님'이 호화 병실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감옥에서 팔굽혀펴기를 하며 건강을 다지던 서남대 설립자가 병보석으로 풀려나간 일도, 멀쩡히 걸을 수 있으면서도 구속영장 심사받으러 오면서 팔에 링거를 꽂고 침대에 드러누운 영훈학원 이사장의 '환자 쇼'도, 그 빌미는 의사 진단서다.

부르는 게 값인 '고무줄 진단서'는 신뢰 사회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최고 전문가 그룹인 의사들의 진단서를 사람들이 믿지 못한다면, 무엇을 믿겠는가. 허위 진단서야 법으로 다스리면 되지만, 입맛대로의 진단서를 줄이기 위해서는 제도적 제어 장치가 필요하다. 형 집행정지처럼 법원의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의사 진단서는 복수(複數) 의사가 참여하는 병원 심의위원회를 거쳐 나가게 해야 한다. 자신에게 유리한 진단서를 얻으려는 의뢰인이 의사들을 회유하거나 협박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의료분쟁중재원 같은 독립기구가 행정적 효력을 갖는 진단서를 전담하는 방식도 고려할 만하다.

아울러 의사 양성 과정에서 사회적 책무에 대한 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 의사 진단서 한 장에 따라 벌을 받아야 할 죄인이 감옥에서 풀려 나올 수 있고, 연명 치료가 중단될 수 있으며, 사회복지 지원을 위한 공공기금이 부적절하게 쓰일 수 있다는 점을 각인시켜야 한다. 의사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뿐만 아니라 사회 공리와 정의를 지키는 책무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