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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성령을 언제 받는가? 4.

Joyfule 2015. 1. 23. 01:40

 

 

신자는 성령을 언제 받는가?         

― 예수 믿는 것과 성령 받는 것은 구분된다 ─

 

Ⅳ. 결 론

1. 성령내주의 보편성


구약시대에는 사사들이나 선지자들과 같이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성령이 임하신 점(민11:16-17; 29), 특정한 목적을 위한 감화감동이었던 점, 경우에 따라 떠나기도 하였던 점(삼상16:13-14) 등등을 볼 때 대상의 제한성, 조건의 제한성, 관계의 제한성 등으로 말미암은 성령역사의 ‘특수성’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은 이 모든 면에 있어서 구약의 특수성에 대비된 ‘보편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누구나 죄사함만 받으면 성령의 거룩한 처소가 될 수 있으며, 우리 속에 완전히 내주하셔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행2:17; 38-39). 구원의 보편성을 믿는 자는 똑같이 성령내주의 보편성을 믿어야 할 것이다. 구원의 현재성을 믿는 자는 똑같이 성령내주의 현재성을 믿어야 할 것이다. 이는 신학적인 이론이 어떻게 엮어져 있는가와는 무관한 진리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살아 계신 약속이기 때문이다.

2. 성령내주의 과정

성령의 무궁무진하고 다양한 역사, 아니 그보다도 근본적인 절대주권자로서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인간이 그것을 법칙화해서 이해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제한적이요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도행전을 통하여 알게 해 주신 성령강림사건들은, 약간의 사소한 차이들을 제외하면, 성령이 내주하시는 일반적인 과정들을 보여주고 있다.
성령은 말씀을 듣는 자들을 외부에서 감화감동시키심으로 그 말씀을 받아 구원에 이르게 하고, 또 거듭나게 도우신다. 그리고 구원을 받아 거룩하게 된 사람 속에 내주하시게 된다. 이때는 다른 사람의 매개 없이 직접 임하시기도 하고, 사도들의 안수와 같이 다른 사람을 동원하시기도 한다. 이때 보이지 아니하시는 성령이 임하셨다는 표시로 방언을 말하게 하신다. 성령이 내주하시면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시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고 보증하시며, 또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도록 그 사람을 인도하신다.

3. 우리가 어찌할꼬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성령이 내주하시는 시기에 관한 논쟁은 이론구성의 논리성 여부를 떠난 실제적인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즉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약속된 성령의 내주 및 그에 따르는 표적과 은사를 사모하고 환영하느냐 않느냐라는, 신앙생활에의 결정적인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더 적나라하게 이야기한다면, 이러한 체험이 없는 사람이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동시설이나 절충설과 같은, 부정론에 근접한 견해 속에 안주하고 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체험을 구체적으로 가진 사람들은 하나같이 구분설을 부담없이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믿음은 듣고 깨닫는 데 그치는 지식이 아니라, 듣고 깨달은 대로 행하는 삶이라는 근본원리를 돌아보고자 한다(행2:37).


믿을 때에 이미 성령 받은 것이라고 굳이 우기는 것 자체가 큰 잘못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의 체험 앞에 교만하고 거짓된 태도를 고집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가 어떤 견해를 주장하건, 사모하고 무릎끊는 심령 속에 성령으로 임하셔서, 풍성한 체험과 축복을 틀림없이 역사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적어도 성령론에 관한 한, 말씀이 울타리 쳐주신 범위 내에서는 얼마든지 약속된 것들을 제한없이 체험해야 하며, 그것만이 성령론을 언급할 만한 최소한의 자격요건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알다’라는 히브리어는 바로 ‘체험하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불신자에게 구원론을 기대하지 않듯, 미체험자에게서 성령론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성령을 ‘아는’ 자 곧 성령을 ‘체험한’ 자의 더 확실하고 더 정확한 성령론을 고대하며 이글을 맺는다.     글쓴이 : 경이로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