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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성령을 언제 받는가? 2.

Joyfule 2015. 1. 21. 00:23

 

신자는 성령을 언제 받는가?         

― 예수 믿는 것과 성령 받는 것은 구분된다 ─

 

Ⅱ. 세 견해의 개관

1. 예수믿을 때에 성령받는다는 견해 (동시설)

⑴ 근 거
첫째,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말씀하신 대로, 예수를 믿는 순간에 이미 성령을 받은 것이다.
둘째,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인은 이미 믿을 때부터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이 내주하고 계신다.
셋째, 사도행전 10장의 사건(10:44-48)에 나타난 것처럼, 말씀을 듣고 믿을 때에 성령이 이미 내주하신다.
넷째,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사건(2:1-4)은 일회적으로 완전히 성취된 사건으로서, 오늘날은 성령이 또다시 새롭게 임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이미 단번에 다 부은 바 되었고 이미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오순절 때와 같이 성령을 주십사고 기도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믿을 때에 당연히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이다.

⑵ 비 판
첫째,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라 거룩한 곳 즉 죄가 없는 곳에만 거하신다. 그런데 인간은 예수를 구세주라 시인할 때 비로소 죄사함을 받고 거룩해진다(롬10:10). 따라서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은 거룩해지기 전이며, 이것은 바로 성령이 내주하시기 전에도 성령에 의해 믿음을 고백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때의 성령의 사역은 분명히 내주가 아닌 형태, 즉 구약 때부터 존재해 온 성령의 감화감동인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 별도로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둘째, 로마서 8장 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영은 성령이 아니라 양자의 영 곧 복음을 의미한다. 이에 관해서도 뒤에 별도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셋째, 성령은 영혼의 죄가 용서받은 다음에 임하시는 분이므로, 사도행전 10장의 사건은 예수를 믿고(말씀을 듣고) 동시에 성령을 받은 예가 된다. 그러나 이것이 곧 바로 동시설을 지지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시점’과 ‘사건’은 구별해야 할 별개의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믿음(회개, 영접, 구원)이라는 것과 성령받음(내주)이라는 것은 각각 별개의 사건이다. 이 두 별개의 사건이 시간의 차이를 두고 진행된다면, 그 두 사건은 또한 두 개의 시점으로도 구분된다. 그러나 만약 두 사건의 시차가 미미하거나 아니면 실제로 동시에 두 사건이 일어난다면, 그 두 사건은 시점상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두 개의 사건이 한 시점에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바로 두 개의 사건을 한 개의 사건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즉 동시에 일어났다고 해서 그 일이 한 사건이라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라는 것이다.
사도행전 10장의 사건(예)은 바로 이와 같은 경우이다. 다른 장의 사건(예)들과 비교해 볼 때 10장의 사건(예)은,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된 시점과 성령이 내주하여 방언을 말하게 된 시점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 예일 뿐이다. 즉 믿음과 성령받음 사이의 시차가 작다는 점에서 다른 장의 사건(예)들과 양적인 차이만 있을 뿐인 것이다. 오히려 내면적인 믿음이 별도의 외면적인 현상(성령내주에 의한 방언)으로 확증된다는 것을 통하여 두 개의 사건(믿음과 성령받음)이 발생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0장의 내용은 특히 2장의 성령강림장면(2:37-41)과 비교할 때, 회개(구원)와 침례와 성령내주가 부분적으로 순서는 바뀔 수 있어도, 그 각각은 엄연히 구분되는 별개의 사건들이요, 반드시 거쳐야 되는 사건들임을 나타내는 증거로서 의미를 갖는다.
넷째,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요15:26)은 원어상 3인칭 단수 현재형(εχπορευομαι)으로서 ‘계속 나오신다’는 뜻이므로 성령은 현재도 계속해서 새롭게 임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또 사도행전 2장 사건(2:37-41)에서 보는 대로 회개와 침례와 성령내주는 ‘각각’ 실제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2. 예수 믿을 때 성령이 내주하나 성령침례를 받아야 성령의 사역이 나타난다는 견해(절충설)

⑴ 근 거
첫째, 동시설의 근거를 인용하는 것 외에도,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말씀하신 대로, 거듭남은 성령의 사역이요 거듭난 자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자이다.
둘째, 사도 바울의 회심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 9장의 사건에서, 성령을 받은 때는 다메섹 도상에서 빛을 보았을 때요, 성령침례를 받은 때는 다메섹에서 아나니아가 안수하여 다시 보게 된 때이므로, 두 가지는 구분된다.
셋째, 삼손이나 다윗과 같은 구약 신자들의 예가 말해 주듯 성령의 사역은 내주와는 달리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⑵ 비 판
첫째,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과 성령의 내주는 구별되는 사건이다. 예수께서 죽으신 날부터 오순절 성령강림 때까지의 50여일 간에는 비록 성령의 내주는 없었을지라도 구원과 중생(거듭남)은 완전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십자가상의 강도는 그 대표적인 예로, 주님은 그가 구원받고 거듭났음을 아셨기에 하늘나라(낙원)에 갈 수 있음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거듭남은 성령의 감화감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 별도로 보충설명을 하고자 한다.
둘째, 바울이 본 빛은 성령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며(요1:9), 바울이 실제로 성령을 받은 것은 아나니아가 안수할 때였다. 아나니아는 바울이 길에서 본 빛이 예수임을 분명히 밝히며 안수하였고(행9:17), 그때서야 바울은 성령을 받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셋째, 구약의 신자들은 아직 죄를 용서받지 못한 상태이므로 성령이 그 속에 들어가실 수 없었고 단지 몸 밖에서 감화감동하심으로 능력을 나타냈다. 그러나 신약의 신자들이 나타내는 능력은 이것과 원리가 다르다. 성령이 내주하시고 그에 따라 외부적으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견해는 근본적으로 성령의 내주와 감화감동, 성령과 성령의 능력을 구분하지 못함으로써 혼동을 빚고 있다. 그 결과 사도행전의 사건들을 “성령받는다”는 성경상의 표현대신 성령침례 혹은 성령충만이라는 표현으로 대치함으로써 오해와 부작용을 일으킬 소지를 심각하게 내포하고 있다. 즉 왕권을 가지고 능력과 함께 우렁차게 임하시는 성령의 임재를 제한적·축소적으로 인정하도록 유도하고, 오히려 따르는 능력이 성령 자신보다도 더 부각되기에 이른 것이다.
사도행전 1장 4절에서 8절과 2장 1절에서 4절에 의하면, ‘성령침례 =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 성령의 임하심 = 성령의 내주’라는 등식이 성립함을 쉽게 알 수 있다. 다른 한편, 절충설이 언급하고 있는 ‘성령침례’라는 내용은 실제로는 오히려 성령이 아니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1:8)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 자신과 그분의 능력(권능)은 실체가 다른 별개의 것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성령은 능력이 아니라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요, 능력은 성령이 임한 결과 나타나는 현상(표적과 은사)이다. 그래서 성경은 ‘능력을 받으라’하지 않고 ‘성령을 받으라’ 하심으로써 두 가지를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3. 예수 믿는 것과 성령 받는 것을 구분하는 견해(구분설)

⑴ 근 거
첫째, 사도들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 이미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었다(요15:13, 17:16-19).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은 그 이전과는 달리 사람의 속에 내주 하러 오신 것이요, 그 표적으로서 방언을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둘째,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요20:22)고 별도로 명하셨으며, 승천하시기 직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행1:4)고 명하셨다.
셋째, 예수의 죽음 이후 및 부활과 성령강림 사이의 50여 일간은 믿음은 있었으나 성령은 받지 않은 상태였다. 십자가상의 강도의 예(눅23:43)는, 성령강림 없이도 보혈공로를 믿음으로써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거듭남은 성령의 강림(내주)이 아닌 감화감동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동시에 가르쳐 준다.
만일 믿을 때 성령받는다고 한다면 이 50여 일간의 믿음은 성령받지 못한 상태의 불완전한 믿음이라는 설명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의 보혈공로가 그 기간 동안은 불완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설명이 불가피한 것이다.
넷째, 구약의 성령론도 이 구분을 지지하고 있다. 이것은 죄인의 상징인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는 것에서 매우 은혜스럽게 묘사되어 있다(레14:15-20). 즉 귓부리에 피(구속)를 먼저 바르고 나서 그 위에 다시 기름(성령)을 바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절기에도 같은 이유로 유월절과 오순절이 구분되어 있다.
다섯째, 앞의 두 견해가 사도행전의 다섯 장에 나오는 성령강림사건 중에 하나씩만을, 자기 논리대로 불완전하게나마 설명할 수 있는 반면, 이 구분설은 그 모두를 충돌 없이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다.

⑵ 비 판
첫째, 2장의 마가다락방 사건(2:1-4)은 이미 구원받고 거듭난 자들에게 성령이 최초로 내주하셔서 비로소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 뒷부분의 베드로의 설교(2:37-41)에서도 회개(구원)와 침례와 성령강림을 구분하고 있다. 9장의 바울의 회심사건(9:1-19)과 10장의 고넬료일가사건(10:44-48)은 앞에 설명한 것으로 대신한다.
둘째, 8장의 사마리아사건(8:14-17)은 말씀을 받고 침례까지는 받았으나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는” 사마리아에, 사도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고 “안수”함으로써 성령을 받게 되는 과정을 시간의 경과에 따라 상세히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구원의 믿음과는 별도로 성령 받기를 사모해야 한다는 것과, 성령을 받기 위해서 기도와 안수라는 행위도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19장에 나오는 에베소에서의 성령강림사건(19:1-7)은, 믿음과 침례와 성령받음과 그 표적(방언과 예언)을 명문(明文)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들은 믿을 때에 성령을 안 받았다고 직접적으로 대답하고 있으며, 바울을 통해서 성령이 있음과 예수의 침례가 있음을 비로소 듣고는, 그대로 순종하여 침례 받고 성령을 받으며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되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어떤 자들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구절을 “믿을 때에 성령 받는 것이다”또는 “믿을 때에 이미 성령 받은 것이다”라는 의미로 착각하여 이것을 동시설의 근거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이 질문은 성령 받는 것이 믿는 것과 구별되는 것임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질문이다. 만일 믿을 때에 자동적으로 성령이 임한다면 굳이 이와 같이 질문하지 않았을 것이며, 오히려 “믿느냐” 하는 한가지 사항에 대한 질문으로 충분할 것이다. 가장 영감있고 권위있는 것으로 공인받는 킹 제임스판 영어성경은 이 구절을 “믿은 이후에(since ye believed)”라고 번역하고 있음도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