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아 Olivia (1888)
바이올라: 아가씨, 얼굴을 보여주세요.
오늘은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1564-1616) 의 희극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십이야 Twelfth Night (1600)”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원래는 진짜 십이야 (1월 6일 밤) 에 이 글을 올리려고 했었는데 2주나 늦게 올리게 됐네요. ^^; 십이야는 크리스마스로부터 12일째 밤을 가리키는데, 유럽에서는 이때까지가 크리스마스 축제 기간이라고 합니다. 원래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이때를 성탄절로 쳤고 지금도 동방 정교는 그 전통을 따른다고 하네요. 이 희극은 바로 십이야에 엘리자베스 1세 어전에서 상연된 작품이라서 이런 제목이 붙었다고 해요.
“십이야”가 초연된 1600년 경 그려진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
(사실 이때 여왕은 70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이렇게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그려졌답니다. ^^)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쌍둥이 남매인 바이올라 Viola 와 세바스찬 Sebastian 은 난파를 당해서 서로의 생사를 모른 채 일리리아 Illyria 라는 곳에 닿게 됩니다. 바이올라는 일자리를 찾다가 이 지역을 다스리는 공작 오시노 Orsino 의 시종으로 들어가게 되죠. 남장을 한 채 시자리오 Cesario 라는 가명으로 말이에요. 오시노는 바이올라를 총명한 미소년이라고 생각하고 매우 아낍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구혼을 계속 거절하고 있는 아름다운 여백작 올리비아 Olivia 에게 사랑의 사자로 바이올라를 보냅니다.
십이야, 2막 4장 (1840)
(올리비아를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오시노 공작의 모습입니다. 한쪽에서는 올리비아의 광대가 발라드를 불러 분위기를 잡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바이올라가 걱정스럽게 그를 지켜보고 있죠.)
한편 올리비아의 또 다른 구혼자인 멍청한 기사 앤드루 경 Sir Andrew Aguecheek 은 바이올라에게 질투를 느껴서 결투를 신청합니다. 바이올라는 몹시 당황하고, 앤드루는 사실 자신이 겁쟁이였지만, 그걸 보고 역시 연약한 미소년일 뿐이라고 만만하게 여기게 되죠. 하지만 그가 정작 결투장에서 공격한 상대는 우연히 거길 지나던 세바스찬이었습니다. 남장한 바이올라의 모습이 쌍둥이 오빠 세바스찬과 똑같았거든요. (사실 남녀 쌍둥이는 이란성이라서 얼굴이 똑같지 않은데... 설정이 그렇습니다. ^^)
제가 “십이야”를 좋아하는 이유는 우선 이 이야기가 희극답게 정말 유머스럽기 때문입니다. 위에 소개한 줄거리는 아주 단순하게 요악한 것이고, 원래는 재미있는 조연들이 더 껴서 이야기가 좀더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그 조연들은 올리비아의 삼촌으로 술고래에 장난을 좋아하는 토비 경 Sir Toby Belch, 올리비아의 시녀이며 재기발랄한 머라이어 Maria, 올리비아의 광대, 그리고 이들이 작당해서 하는 장난에 처절한 희생양이 되는 올리비아의 깐깐한 속물 집사 맬볼리오 Malvolio 등등입니다. 그리고 앤드루 경도 빼놓을 수 없겠죠. 저는 앤드루가 등장하는 대목이 특히 웃겼답니다.
술에 취해 흥청거리는 토비 벨치 경과 앤드루 애구치크 경 (1792)
머라이어가 앤드루에 대해 말하는 걸 들어보세요. “아무렴, 여러가지로 타고난 분이죠. 바보에다 대단한 싸움꾼이잖아요. 그나마 타고난 비겁함이 싸움 기질을 눌러줘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벌써 황천길로 갔을 거라고 똑똑한 사람들은 다 그러던데요.”
토비와 앤드루는 밤마다 실없는 농담을 하며 술을 퍼마시죠.
토비: 자, 이쪽으로, 앤드루 경. 한밤중이 지나도록 잠자리에 안 들었으니 이건 일찍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요. 댁도 알다시피.
여기에 광대까지 합세를 해 노래를 불러대곤 합니다.
앤드루: 우리 돌림노래는 "임마"로 하자.
"십이야"는 이야기가 크게 두 가지 축으로 전개되는데, 한 축은 이렇게 코믹한 조연들이 중심이 되고 다른 한 축은 로맨틱하면서도 위트가 있는 주연인 바이올라와 올리비아가 중심이 되죠. 이 두 축의 이야기가 정교하게 얽혀서 진행됩니다. 이처럼 "십이야"는 플롯이 탄탄하고,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기에, 많은 비평가들이 가장 탁월한 셰익스피어 희극으로 꼽는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희극의 매력은 두 여주인공이 주고받는 재치가 번뜩이는 대화에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로맨틱 코미디에서는 남녀 주인공이 입심 대결을 벌이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이야기 전개 상 두 여성이 그 대결을 하죠.
베일을 벗는 올리비아 (1874)
다음은 바이올라가 처음 올리비아를 찾아왔을 때의 대화입니다.
바이올라: 제가 누구이고 무슨 일로 왔는지는 처녀의 정조만큼이나 비밀입니다. 아가씨의 귀에는 신성하지만,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신성모독이거든요.
그리고 이건 바이올라가 두 번째로 올리비아를 찾아왔을 때의 대화죠.
올리비아: 이름이 뭐죠?
올리비아와 바이올라
그리고 이 두 여주인공 모두 매력적입니다. 먼저 바이올라의 경우, 자신이 짝사랑하는 남자를 다른 여자와 맺어주는 역할을 떠맡게 되지만, 그 남자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기에, 꼼수를 쓰거나 하지 않고 묵묵히 임무를 다합니다. 참 고결하고 성실한 사람이에요. 그냥 억지로 하는 수준이 아니라 능력을 발휘해 대담하고 재치 있는 언동으로 올리비아의 마음을 흔들어놓죠. 본의 아니게 그 흔들린 마음이 공작이 아닌 자신에게 향하게 되지만. ^^ 하지만 정작 자신의 짝사랑을 제대로 드러내지는 못해요. 그녀는 일에는 뛰어나고 사랑에는 서투른 현대의 전문직 여성을 연상케 하기도 합니다. 흔히 바이올라는 이 희극에서 주인공 중의 주인공으로 여겨지고 명배우들이 바이올라 역을 했어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유명한 배우 비비안 리 Vivien Leigh (1913-1967) 도 바이올라 역을 했습니다.
1955년 상연된 “십이야”에서 비비안 리 (오른쪽)
또 90년대 초에 나온 “셰익스피어 인 러브 Shakespeare in Love”라는 영화에서는 셰익스피어가 자신이 사랑한 여인이 남장을 했던 데서 착상을 얻어 그 여인을 모델로 바이올라를 창조하고 “십이야”를 썼다는 설정이 나오죠. (이건 허구입니다만)
하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더 좋아하는 쪽은 올리비아랍니다. 좀 경솔하고 바보 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요. 잘못 알고 여자를 사랑하고는 또 다시 잘못 알고 남자와 결혼하잖아요. ^^ 하지만 그녀는 결코 얄팍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녀는 타고난 여백작이에요. 열정적이고 대담한 성격 때문에 실수도 하지만, 그만큼 카리스마 있고 또 관대하게 집안 사람들을 잘 통솔하기도 합니다. 그녀의 그런 성격은 광대와 맬볼리오와 나누는 대화에서도 잘 드러나요.
올리비아: 이 광대를 어떻게 생각해요, 맬보리오? 좀 발전하지 않았어?
희곡을 읽다 보면 올리비아의 말투는 언제나 좀 오만합니다. 하지만 그 오만한 말투는 타인을 깔보는 식이 아니라 타고난 자신감의 솔직한 표현이라서 듣기 싫지가 않습니다. 그녀는 공작에게건 공작의 사자에게선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건 한결같이 대합니다. 언제나 좀 도도하지만 따뜻하고 솔직하게요. 저는 그런 올리비아가 셰익스피어의 희극 비극 통틀어 모든 여성 캐릭터 중에서 가장 좋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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