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위해 희생하십시오
신약의 원어는 희랍어였습니다.
희랍어에는 "사랑"이라는 뜻을 가진 서로 다른 낱말이 세개가 있었는데
그것은 "에로스"(Eros)와 "필레오"(Phileo) 및 아가페(Agape)입니다.
이 세 낱말에 해당하는 영어는 "러브(Love)" 하나 뿐입니다.
"에로스"는 성적인 사랑을 의미하는데 "애욕적이다." 또는 "색정적이다"라는 말은
모두 "에로스"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신약에는 이 말이한군데도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에로스"란 일반적으로 우리가 세속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남녀의 사랑을 말합니다.
"필레오"는 인간의 애정과 관심의 의미로 사용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부모의 사랑, 스승의 사랑, 형제의 사랑을 말합니다.
"필랜스로프"(Philanthropy)라는 말은 "박애","자선"이란 뜻으로
"필레오"의 파생어입니다.
이 말은 신약에서 약간씩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가폐"는 희생으로 평가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이 말이 압도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이 인간에게 일으키시는 사랑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3장16절과 로마서 5장5절 및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이 "남편들이여,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했을 때
사용한 사랑은 바로 이 "아가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가 계속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5:26) 고 말했을 때,
그는 분명히 "희생을 각오한 사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의 영적 근간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첫눈에 사람들은 남편과 아버지가 그의 아내와 자녀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로 세워진 것을 봅니다.
이것은 남자에게 훌륭하고 지고한 지위인 것 같습니다.
"나는 내 성의 영주요, 군왕이다."이렇게 남자는 말할 법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심오하게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남편과 아버지에게 속해 있는 거룩한 권위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형성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권위는 주님 자신의 희생에 뿌리박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갈보리에 이르렀을 때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느니라"(마28:1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권위는 인간의 "육신적인"권위가 아닙니다.
따라서 남편과 아버지의 권위도 인간의 "육신적인"권위가 아니빈다.
그것은 한 사람이 타인에게 군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희생에 뿌리를 박고 있는 거룩하고 신령한 권위입니다."
이에 대한 기본적인 가장 분명한 표명은 남편의 가족부양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도덕적 붕괴의 징조는 남편들이 저들의 책임을
아내에게 씌운다는 용이성입니다.
"일하는 아내"와 일하는 어머니"는 우리 문화의 아주 중요한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이탈된 것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 가정생활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쳤음도 알 수 있습니다.
가족을 부양할 짐은 남자에게 있습니다.
여자는 이러한 짐을 자기가 자진하여 맡으려 합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성격은 항상 가재에 주의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짐은 여자에게 너무나도 무겁습니다.
남자는 강인하고 튼튼한 어깨를 받았습니다.
남자는 어떠한 압력에도 견딜 수 있는 정신적인 위대한 힘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마음은 쉽게 낙심하고 쉽게 굴복합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그렇게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역시 남자는 여자에게 가족부양의 책임을 면케 했던 것입니다.
가재를 조심스럽게 알뜰하게 관리하는 것이 여자의 의무입니다.
이러한 소유물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땀을 흘리는 것이 남자의 의무입니다.
알뜰한 살림태도와 절약과 검소는 여자의 가정적인 미덕이며
가정의 경제적인 안녕을 유지하기 위한 휴식없는 활동은 남자의 과업입니다.
아이들을 보살피고 집안일을 관리하는 책임은 아내에게 맡겨진 과업이며,
그 일만으로도 여자에게는 충분합니다.
남편으로 하여금 가족의 부양을 위해 책임을 다하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아내는 남편의 책임 불이행 때문에
남편 몫까지 떠 맡을 수 밖에 없다는 변명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정의 경제생활을 여유있게 유지하기 위해서 아내가 일을 하여야만 한다는
단순한 생각 때문에 우리는 흔히 물질에 대한 노예가 되곤 합니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필요한 경우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아내의 수입이 가정 밖에서
사치로 사용된다는 것도 역시 명백합니다.
일하는 아내도 역시 집안일을 관리할 때 검소의 습관을 별로 몸에 붙이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수입의 경제적 이익을 사실상 감소시킬 뿐입니다.
제아무리 수입이 많다 하더라도 아내와 어머니로 하여금 가정 밖에서
저들의 정력을 소비하게 할 때 가정에 대한 손실을 메울 수 없는 것입니다.
남편으로 하여금 그가 자기 가족을 적절하게 부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십시오.
만일 그가 그에게 알맞는 직업에 종사하여 적절한 수입으로
그 수입 내에서 검소하게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눈에 수치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정의 안녕을 위해 세워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제쳐놓고
물질(돈과 재산)의 정욕에 탐심하는 것은 수치입니다.
교회가 그의 모든 善과 행복과 번영을 위해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의지해야만 하듯이 ,
아내와 아이들은 남편의 신실한 봉사를 통하여
저들이 필요한 물질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자기 가정에 봉사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합니다.
즉 그는 자기의 자아와 자기의 자존심과
자기의 안락을 포기하는 가운데서 자기의 사랑을 표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희생적인 사랑이며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참된 도리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가운데서 가정의 전체적인 책임을 맡고 있는 남편과 아버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해야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하나님께서는 남편은 자기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여지에 대한 남자의 가장 훌륭한 자연적인 사랑
(에로스 사랑)보다는 훨씬 훌륭하고 고귀하며 아름다운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자아"가 부정되고 희생되고 사멸되는 곳에서만이 자라는
희귀하고 신성한 꽃입니다.
이와 같이 "네 아내를 사랑하라"라고 귀하고 신성한 꽃입니다.
이와 같이 "네 아내를 사랑하라"라는 남편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십자가의 친교인 그리스도의 수난의 본질적인 친교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것은 아직 희귀하고 신령한 사랑이기 때문에
여자가 일상생활과 부부생활에 필요로 하는 온정과 안락과 안정과
격려를 여자에게 거의 제공할 수 없을 것 같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이 실제로 얼마나 건전하며 현실적인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