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호(雅號) - 임병식
바라고 기대했던 것도 아닌데, 어찌하다 보니 아호(雅號)를 두 개나 갖게 되었다. 죽곡(竹谷)이라는 것과 청석(聽石)이라는 건데, 둘다 내게는 과분한 것이다. 그런지라 나는 드러내어 사용을 하지 않고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변변한 글 한편도 못쓰는 주제에 남들에게 겉멋만 잔뜩 든 사람으로 비쳐질까 저어되기 때문이다. 하나, 누가 그 중에서 어느하나를 고르라면 청석이란 아호를 들겠다.
왜냐하면 죽곡은 고향마을 죽림(竹林)에서 한자를 따온 것이긴 하지만 발음이 된소리가 난데다 '죽'자도 마음에 뜨앗한 것이다. '죽음'의 머릿글자가 아닌가. 그에 비해서 청석은 닷소리로 끝나서 된소리가 나기는 하지만 취미와 성향을 담아놓고 있어서다.
알다시피 아호는 부르기가 쉽고 뜻이 좋아야 한다. 해서 사람들은 호에 신경을 쓰는데 그때문에 스스로 자호(自號)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개는 남이 지어주는 걸 사용한다. '죽곡(竹谷)'이란 호는 내가 평소 존경하고 따르며 수필도 함께쓰는 정병수선생이 지어주신 것이다. 그리고 '청석(聽石)'은 이고장에서 명필로 이름이 높으신 서예가 정우종선생이 권면해 주었다. 내가 수석을 좋아하는 걸 알고 붙여준 것이다.
이 아호를 받게 된 동기는, 어느날 일정(一丁) 선생이 나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집에 있는 수석을 감상하고 돌아가더니 나중에 와유강산(臥遊江山)이란 글씨 한점 써 주었다. 수석에 파묻혀 수석과 함께 사는 나를 보고 무언가 느낀 것이 있었던것 같다.
그런 후에는 또 불쑥 이 아호가 어떠냐며 했던 것이다. 그때는 마침 전에 받았던 아호가 썩 내켜지지 않던 차였는데 귀가 쫑긋해 졌다. 뜻도 돌의 소리를 듣는다 함이니 수석의 아취를 한껏 담아놓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수석계의 원로 중에는 성석(聲石)이란 호는 쓰는 분이 계셨다. 한데 그 아호에 비해서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대번에 받아 들일수가 없어서 "지어준 성의는 고맙지만 사양할랍니다" 하고 정중히 거절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선생은,
"딱 좋은데 뭘 그러세요, 임지부장이 돌을 예사 좋아하지 않았으면 내가 그리 지어주지도 않었어요.사양말고 그냥 청석이라고 쓰시오" 하고 강권을 했던 것이다. 해서 엉거주춤 받아들게 되었다.그런 후로는 얼마 안되어 선생께서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나에게 호를 지어 주신 두 분은 모두 나와는 각별하고 인품 또한 훌륭한 분들이다. 먼저 정병수 선생님을 말할 것 같으면 고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오랫동안 인재를 키워내신 교육자답게, 몸가짐이 조신하시고 특히 한학에 밝아 퇴임 후에는 서당을 여시고 사서삼경을 강독하고 계신다.
나하고는 수석취미와 함께 수필문학을 같이 하고 있다. 그리고 일정 선생님은 오로지 한길, 서예가로서의 외길을 걸어오신 분이다. 국내에 서예 특선작가가 20명 남짓이던 때 국전에 특선입상하여 자만함이 없이 정진을 해왔다. 글씨를 매우 아껴서 남발하지 않아 이곳 지방에서도 당신의 글씨를 쉬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다. 진남관 진해루와, 한산사, 예총회관에 당신의 편액이 걸려있다.이런 분이 내게 후의를 보인 것은 아무래도 예총회관을 짓는 과정에서 머리를 맞대고 구상하고, 예총 30년사를 함께 펴내면서 고락을 같이한 정분때문이지 싶다.
한데, 하나는 아호가 썩 내키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도 물리쳐 버리지 못하고 어정짱한 상태로 묵혀 두고 있다 . 호란 쓸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사용하면 여간 고상해 보이지 않다. 거기다가 거처나 취향, 인생관을 엿볼수 있어 얼마간 사람의 내면도 살필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한번 아호를 받은 이상, 인격도야에 매진해야 되지 않을까 한다. 그것이 아호를 지어준 분들의 뜻에 부응하는 길이기 때문이다.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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