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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참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인가?(7)

Joyfule 2014. 10. 1. 22:19

 

 

어떻게 참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인가?(7)

 

하나님을 감동시켜라. - 어떻게 하나님의 참복을 받을 것인가?(7)

하늘의 복이든 아님 이 땅에서의 평안하고 형통한 삶이든, 그게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면 공급자가 가장 먼저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굴까 생각해보라. 당연히 가장 기뻐하며 그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사람이 최우선으로 풍성히 받게 될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은 모든 크리스천이 다 아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르다. 알고 있어도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알지 못한 것보다 못할 것이다.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

  마 22:37~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어릴 적 동화책에서 읽었던 청개구리 이야기가 있다. 아들청개구리는 엄마의 말씀을 듣지 않고 속만 썩이다, 그만 엄마청개구리는 깊은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말에 따르지 않고 반대로만 행하는 아들청개구리에게 자신의 무덤을 냇가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그렇다면 평소에 했던 것처럼, 말을 안 듣고 거꾸로 안전한 산에 묻을 것을 예상해서 한 말이다. 그렇지만 엄마 생전에 그토록 말썽을 피우던 아들 청개구리는 엄마가 죽자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유언을 지켜 냇가에 묻었다. 그래서 비가 오기만 하면 무덤이 떠내려갈까 봐 목 놓아 울게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다.

이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말이라면 그 사람의 말을 지키고 행하는 것으로 이를 증명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맹세하는 크리스천이라면, 역시 최선을 다해 그분의 뜻에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말하는 계명이란 지켜도 되고 지키지 않아도 되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생명을 걸고 좇을 것을 요청하셨다. 목숨을 걸고 지킨다는 의미가 너무 엄숙해서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현장의 삶에서 무슨 결정이든지 우선순위를 두어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적지 않은 돈을 희생해야 할 것이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때론 손해도 보고 핍박과 불이익을 당할 지도 모른다. 왕따를 당하며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심한 욕설도 감내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기에,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평소에는 그분의 뜻을 따르는 제자로 신분을 내세우지만, 눈앞에 이익이 보이면 이를 번복하며, 손해가 보인다면 당초의 결심을 철회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이는 목숨은커녕 사소한 재물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신의 없고 양심이 얄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크리스천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영향력을 잃고 힘없이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다. 교회에 오면 거룩하고 헌신적인 제자의 모습을 보여 주시만, 세상에 나가면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지혜를 가지고 탐욕을 좇아 살아가기에 하나님을 실망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어서이다. 자신의 죄를 대신 갚아주시려 십자가의 고통을 거절하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만분의 일이라도 깨닫는다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길을 알게 된다. 그렇지만 깊은 깨달음이 없기에, 세상에서 신앙의 열정이 없이 살아가며 주일예배조차도 형식적인 종교행사를 반복하는 선데이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가 사는 세상의 삶은 일시적이고 임시적이다. 그토록 소중히 여기고 아끼던 재산이나 가족, 사업조차도, 내게 오래 있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몰두하며 애쓰고 힘쓴다 할지라도 자신의 기대와는 늘 어긋나고 실망과 한숨의 시간만 채워지게 된다. 사실, 사람의 존재는 거대한 자연환경이나 막강한 세상제도의 틀 안에서 돌아가는 아주 작은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는다.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 낡아 빠진다면 속절없이 다른 톱니바퀴로 교체된다. 더 이상 쓸모없게 된 톱니바퀴는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황혼의 그늘에 묻혀 체념을 배우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하나 둘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게 사람에게 주어진 인생의 단면이다. 그렇지만 아무도 일러주지 않았고 삶의 최후를 경험하지 못했기에,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다람쥐가 빈 통을 돌리듯 인생의 헛바퀴를 계속 돌리며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뼈저린 성찰을 통해야만 자신과 삶에 대한 정체성을 갖게 된다. 이 과정을 철저하게 거쳐야 비로소 자신의 나아갈 길이 보이게 된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삶이지 깨닫는 자만이 얻게 된다. 그 중심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자리한다. 그 사랑을 철저하게 깨닫고 변화를 받아 새로운 각오로 남은 인생을 살겠다는 자세를 보여야만 한다. 그래야 세상을 지으시고 자연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되셔서, 그분의 뜻을 좇아 뜨겁게 살아가게 되는 힘을 얻게 된다. 그때서야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놀라운 능력의 제자가 될 수 있으며, 성경에 약속하신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맛볼 수 있다.

   마 22:39~40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말과 함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처럼 흔해 빠진 것은 없다. 도시의 무수한 교회 벽에, 성전을 치장하는 현수막으로, 혹은 무심코 발길에 밟히는 전도지에서 너무 흔하게 보아 왔기에 우리는 무관심하다. 그렇지만 이 말속에는 하나님의 뜨거운 심장이 살아있다. 하나님은 사랑덩어리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신 예수님은 눈물이 흔한 분이셨다. 고생과 가난에 찌든 자들이나, 질병이나 귀신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그들을 고쳐주시기에 앞서 눈물이 먼저 나왔다. 이 눈물의 원천이 바로 우리를 끔찍이 사랑하시는 마음이다.

이 세상과 온갖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지은 인간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셨다. 그리고 피조물들이 풍성히 먹고 살만한 환경을 만들어 주셔서, 모두들 아름다운 세상에서 기쁘고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셨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가난한 자, 노인, 장애인, 고아, 과부 등 스스로의 노동력으로 살 수 없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그들을 먹여 살리실 책임도 하나님의 몫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세상의 관리자로 지목한 인간들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시행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넣어 주셨다. 그렇지만 이를 성심껏 실천하는 자도 있고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를 기뻐하시겠는가? 물어볼 가치도 없이, 자신의 몫을 정성을 다해 시행하는 사람을 흡족하게 여길 것이다.

 

교회와 크리스천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교회는 재정의 3%도 안 되는 돈을 구제에 사용한다. 나머지 97%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만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명령을 성심껏 지키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복을 나눠주고 축복할 권리가 있는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우리도 과거의 자신의 행동을 곰곰이 생각해보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가난한 이들에게는 매몰차게 대하고 내미는 손을 외면하면서, 새벽마다 밤을 새워가며 금식하고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들어주시겠는가? 크리스천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지 못하고 세상에서 힘이 없이 살아가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관심을 갖기로 하자. 내 주변의 가난한 이웃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하나님에게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기도는 가증할 수밖에 없다.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돌이켜 가난한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부터 넣어달라는 기도부터 해야 할 것이다.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녹인다.

우리나라 교인들이 열심히 하는 것 중의 하나는 기도이다. 새벽예배나  철야예배 때에도, 심지어는 식사를 앞에 두고서 빼놓지 않고 열심히 한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는 것만큼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을 것이다. 응답 없는 기도는, 그 기도의 내용이 잘못된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하는 기도는 귀를 닫고 듣지 않으신다고 했지만, 대부분의 기도는, 자신과 가족들이 성공하고 부자가 되며 형통한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물론, 먹고 사는 생계의 문제는 기도하기 이전에 이미 알고 계셔서 공급해주시겠지만, 탐욕을 만족시키는 기도라면 아무리 열심을 드린다고 하더라도 헛수고일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내용이나 기뻐하시는 뜻의 기도인데도 불구하고, 응답이 시원치 않은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왜 성경에 수도 없이 약속한 내용이고 내게 주시겠다고 확언한 것인데, 내게는 아무런 응답의 느낌조차 없는 시간이 대부분일 것일까?

결론적으로, 모든 기도가 즉각 응답이 오는 것은 아니다.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내용이어야 하겠지만, 그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의 자세를 보이는 자가 먼저 응답이 올 것이다. 그러한 기도는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간절하다는 것은 마음이 녹는 기분이 되어  기도에 몰입하는 것을 말한다. 기도하는 중에 손에 땀이 배기도 하며 주변사람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큰소리로 외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기도는 시간가는 줄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견고한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탄탄한 믿음이 없다면, 정성과 마음을 다 바쳐 간절히 기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기도하기에 앞서, 진리 안에 바로선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립하고 견고한 믿음을 먼저 가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믿음 없이 기도하는 것은, 단지 행운을 믿거나 성의 없이 드리는 형식적인 기도에 불과하다. 믿음에 바로선 기도라 하더라도, 오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형식적인 틀 안에서 기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나님은 형식보다 그 마음을 깊이 꿰뚫어 보신다. 결코 기도행위의 희생의 정도나 드리는 시간을 보지 않으신다. 오래된 신자들은 이미 몸에 밴 매너리즘으로 집중하지 않고 기도시간을 적당히 때우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기도하면서도 잡념이 머리를 떠나지 못하고 시계만 쳐다보다 기도시간을 마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기도에 집중하려면 경건의 훈련으로 몸과 마음에 배어있어야 빠른 시간에 몰입할 수 있다. 그래서 늘 하는 기도라도, 매일 매일 마음을 새롭게 하고, 몸을 쳐 복종하는 깨우침의 시간이 늘 반복되어야 한다. 물론 기도시간마다 언제나 깊게 몰입하여 기도하지 못하겠지만, 이를 반성하고 회개하여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기도의 행위는 허망한 열매만을 맺을 것이다. 하나님은 신앙의 연륜을 보지 않고, 기도하는 순간에 뿜어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간절함을 보시기 때문이다.

   눅 17:5~6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말했을 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산을 옮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믿음은 배우고 키우는 것보다,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커나간다는 사실이다. 이는 기도에도 적용할 수 있다. 수로보니게 지방의 여인이 예수님께 자비를 구했을 때, 돌아온 것은 이방인에 대한 모멸 찬 거절의 말뿐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허락할 것을 믿고 포기하지 않았다.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다닌 과부의 이야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 과부는 불의한 재판관일지라도,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을 믿고 의심치 않았기에 결국 소원을 이룰 수가 있었다. 불의한 재판관도 확신에 찬 행위에 혀를 내두르며 손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당연히 기도를 들어주실 거라는 말이다.

결국 간절히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요소이지만, 응답이 올 때까지 확신을 갖고 기도행위를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도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포기를 모르는 끈기도 믿음을 드러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신이 응답해줄 것을 믿어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이들에게 언제나 먼저 손을 들고 만다. 견고한 믿음으로 무장한 이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이전에, 먼저 우리에게서 당신이 기뻐하시는 태도를 보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아버지이시며, 십자자의 희생도 마다하지 않고 몸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되찾아 오신 분이다.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복을 왜 주시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복을 주시기에 앞서, 견고한 믿음을 통한 친밀한 관계를 확인하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의 복을 풍성히 받은 사람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깨닫고 올곧은 마음으로 삶에 적용한다면 천국이 멀지 않을 것이다.

 

출   처 : 다음 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 신상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