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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참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인가?(5)

Joyfule 2014. 9. 29. 06:20

 

 

어떻게 참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인가?(5)

 

 

온전한 성품이 없다면 축복도 없다. - 어떻게 참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인가?(5)

어제도 필자는 세미나를 하고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다급한 전화 상담을 받았다. 어느 목회자가 어려운 재정상황을 타개하려는 해결책으로 제시한 내용이, 물질을 심으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즉, 돈을 교회에 드린다면 씨앗이 되어 많은 부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잖아도 어려운 재정형편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림이 더욱 힘들어질 것이라는 위협에(?) 두려워서 망설이다 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말한 목사는, 어느 신학교에 교수의 직함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투의 말은 하도 많이 들어와 마음에 동요조차 일으키지 않는 처방이었지만, 신도가 재정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결책으로 주어지는 목회자의 일반적인 제안중의 하나이다.

 물론 이 말은 성경적이지 않다. 그렇지만 왜 이런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하는가? 크리스천 스스로가 성경을 펼치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하기보다, 목사의 직함을 가진 이에게 통째로 맡기거나 기도를 통한 신비스러운 해결방법만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열심히 읽고 그 뜻을 구하기를 노력한다면 거짓목회자나 삯꾼목자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평안하고 건강한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데, 왜 그런 방법을 도외시한 채 위험하고 비합리적인 방법만 찾아다니는 지 도대체 알 수 가 없다.

지상적이고 현세적인 복만을 복으로 여기는 우리의 눈에는, 예수님이 팔복으로 가르쳐준 복의 조건이 맘에 차지 않는다. 그래서 축복의 주제로 설교하는 본문으로 그다지 인용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으며 살아서 지금도 우리의 삶을 다스리고 있다. 이를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선택의 자유로 남겠지만, 그 결과의 책임만은 겸허하게 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복의 조건으로 성경을 관통하여 우리에게 누누이 말하고 있는 것은 깨끗하고 자비로운 성품이다. 우리가 원치 않더라도 이를 제쳐놓고는 하나님의 복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다른 좋은 성품도 필요하지만, 이 두 가지 성품은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지구상에 창조한 생물체중 유일하게 인간에게 거룩함의 DNA를 넣어 주셨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았는데, 이는 모습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닮게 지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가 없다.

잠언에서 지혜의 내용으로 조목조목 말하고 있는 것 중의 절반은 좋은 성품에 관한 것이다. 정직해라. 베풀어라, 방탕하지 말라, 성내지 말라. 등 깨끗하고 자비로운 성품을 지겹도록 중복해서 말하고 있다. 신약에서 성령의 열매로 지목하고 있는 성품의 덕목과도 별 다를 것이 없다. 이는 성경을 관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에게 갖추기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있기 때문이다.

깨끗해라.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악한 것을 행하지 않고 이웃을 속이지 않는 순진하고 솔직한 마음을 가리킨다. 이는 재물이나 말, 혹은 이성 관계 등의 솔직담백한 행위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행위이전에 마음의 중심을 이루는 생각과 동기가 깨끗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정직하고 솔직한 성품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조건이라고 예수님은 말하고 있다. 이는 천국의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말하고도 있지만, 이 땅을 살아가면서 주님과 동행하고 함께함으로 얻어지는 평안하고 형통한 삶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의 지혜와는 달리, 솔직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은 부자가 되는 하나님의 원칙과는 차이가 있다. 세상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적당히 현실과 타협을 하며, 불의하고 비도덕적인 방법이라도 손해를 입는 대상이 분노하며 비난하지 않는다면 이에 개의치 않는다. 즉 자신의 불법이나 비도덕의 행위로 인해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이, 자신에게 이의 수정을 요구하며 손해배상 등을 청구하지 않는다면 이를 철회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부를 얻을 기회가 있다면 무조건 잡아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좋은 기회를 잡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이며, 대부분의 부자들도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기에 부를 이룬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법적이라 해도 상대적으로 손해 보는 사람들의 대상은 막연하며 애매모호한 기준이고, 비도덕적이라고 양심이 속삭여도 이 정도쯤이야 거친 세상을 살아가려면 치러야할 비용이며, 이런 것에 연연해하는 것은 약해 빠진 어린애 같은 감정이라고 애써 일축한다. 피해가 미미하며 책임과 비난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는데, 이 천금의 기회를 왜 놓치겠냐는 투이다. 대부분의 부자들이 부를 쌓아 올린 과정을 파헤친다면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에게는 여태껏 이런 좋은 기회가 없었기에 힘들고 고생하며 살았다는, 경험에서 나온 인생철학(?)인 셈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런 세상의 지혜에 대해 단호하다. 정직하게 살고 이웃을 속이지 않으며 누가 보더라도 깨끗하고 떳떳하게 살아야 할 것을 결곡하게 주문한다. 물론 세상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은 원치 않는 손실을 입을 수도 있으며, 그렇지 않은 동료나 이웃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맞을 수도 있다. 사실, 세상의 지혜는 적당하게 타협을 하며,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이 말은 직접적인 손해의 대상이 눈앞에 없다면 불법적이거나 불의한 일도, 눈치를 보아가며 적당하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행위라고 말한다.

심지어는 이를 융통성이라는 덕목으로 여겨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가 되는 능력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세상적인 지혜를 좇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외면하는 것과 동일한 행위이다. 그렇다면 세상이 주는 지혜를 좋아 부와 성공을 얻는 복을 얻을 것인지, 아님 하나님의 방법을 좇아 하나님의 부를 얻을 것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며 삶의 경험으로 몸에 밴 세상의 지혜를 택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복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택하는 것보다 쉬운 이유이다. 적지 않은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복을 바라면서도 세상 사람들의 지혜를 놓지 않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온전한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고 있다.

   마 10:16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시고 우주를 운행하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다. 전지전능하시며 신묘막측하신 분이다. 재물과 권력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 분의 소유이다. 깨끗하며 정직한 행실을 택하는 것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견고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비록 눈앞에는 당장 손해가 보이고 손실이 닥치더라도 놀라운 지혜를 주시며 도울 환경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여기에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깨끗하고 정직하게 행하는 데도 지혜롭게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작정 맹목적인 믿음을 앞세워 주위 사람들과 주변의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철학을 밀어붙이는 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행위 일지도 모른다. 깊은 산속에서 혼자 살아간다면 자신이 무얼 해도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겠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복잡한 조직과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얽혀 살아간다. 그러므로 나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한 행동일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특히 조직의 냄새나고 은밀한 부분을 드러내거나 비도덕적이고 불법적인 관행을 밝히는 일이라면 타격이 적지 않을 것이다.

 

자신만 정직하고 깨끗하게 산다며 다른 사람이 선의의 피해를 보게 한다면 예상치 못한 엄청난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말과 행위가 미칠 파장을 고려해서, 피해가 크지 않도록 시간을 가지고 미리 차근차근 지혜롭게 준비하고 대비책을 마련한 후에 조심스럽게 적용해야 할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이나 자신이 속한 조직에 피해가 없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돌아올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것인가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시행하여야 할 것이다. 자신만 깨끗하고 남은 악하다는 태도로서, 자신만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자세로 시행한다면, 얼마 가지 못해서 엄청난 보복의 파도를 맞게 되어 삶의 고난에 맞닥뜨리게 된다. 떳떳하고 깨끗한 행동이라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조직에 감동을 주어야 상생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깨끗하고 정직하게 행해도, 미련하고 어리석은 꼬리표가 붙어 다니며 삶의 고난과 고생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불쌍히 여기고 베풀어라.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은 사랑이다. 성경은 전체를 관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으로 뭉쳐있는 분이신가를 잘 나타내고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고 딴 길로 가는 일을 밥 먹듯이 했지만, 마음을 돌이키면 언제든지 용서해주시고 다시 사랑으로 보듬어 안아주셨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이다.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위해 몸소 십자가의 잔혹한 형벌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뼈를 깎고 생살을 도려내는 고통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셨다. 그분은 공생애를 통해서 허다한 무리들의 질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쫒아 주셨으며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리셨다. 삶의 고난에 처한 이들을 보면 마음아파하시며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었어도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와 병자의 아비였으며 과부와 고아의 편이셨다. 이들의 고생과 험난한 처지를 보면 한없는 눈물을 쏟으셨고 불쌍한 마음을 억제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시고 자신이 친히 만드신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에게 풍성히 먹고 살만한 환경을 만드셨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지만 노동을 통해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만드셨지만, 노동력이 없어 스스로 생존을 할 수 없는 이들이 있다. 소년가장, 고아, 노인, 장애인, 병자 등이다. 이들은 스스로의 노동력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에 의탁해야 살아갈 수 있다. 이들을 먹여 살리시는 것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몫이지만, 우리에게 자비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넣어주셔서 이를 대신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가난하고 불행한 이들을 불쌍히 여겨서 먹이고 입히는 일은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조차도 아무 대가없이 공급해 주시는 분이데, 자신의 일을 대신하는 사람들을 어찌 빈손으로 돌려보내시겠는가?

   잠 11: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위의 성경구절은 세상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을 소개하고 있다. 재물을 아끼고 쌓아둔다면 후에 부자가 될 것이며, 자신의 재물을 다른 사람에게 퍼준다면 당연히 가난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세상을 법칙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세운 원칙을 스스로 깨는 위의 말씀은 어찌 된 일일까? 그것은 자신의 일을 대신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대가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어,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도록 만드셨지만, 이를 몸소 행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며 모범을 보여야 하는 교회조차도, 교회재정의 3%도 안 되는 돈만을 구제에 사용하고 있다. 교회를 건축하고 예배를 드리는 환경을 안락하게 하는 데는 많은 돈을 사용하면서, 정작 가난한 일을 돕는 중요한 일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자신에게 유익이 돌아오지 못하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 생색을 낼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보다 자신들의 유익을 좇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여전히 가난하고 교인들은 삶이 힘이 없다.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관심을 보이기보다, 교인들과의 친목이나 종교행사에 불과한 신앙행위에 몰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교인은 많고 교회 수는 많아도, 여전히 대부분의 교회는 돈이 부족하고 목회자는 극도로 가난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복을 넘치도록 내려주고 싶어도, 성경내용은 알고 있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해 무관심하고, 신앙행위는 열심이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지 않는 교인들로 빼곡한 교회가 넘쳐나기에, 이를 대신하는 거짓축복과 삯꾼목자들이 활개를 치며 기복신앙을 하나님의 참복인양 소리치며 교회를 점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의 축복을 받아 누릴 사람이 있는지 등불을 들고 눈에 불을 켜고 찾고 계신다.

새벽예배를 드리는 행위를 알리고 싶어 하고, 십일조의 액수를 은근히 자랑하며 교회의 직책을 드러내고 싶은 이들보다, 따뜻한 마음으로 가난하고 불쌍한 이를 보면 은밀하게 도와주고 싶어서 몸살을 앓은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그래서 자신의 축복을 한없이 넘치게 부어주고 싶어 하신다. 그리고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지어다.’(마 25:21)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출   처 : 다음 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 신상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