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참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인가?(6)
의의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라. - 어떻게 참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인가?(6)
우리가 늘 원하는 세상적인 복도 살아가면서 필요하지만,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날들은 제한적이다. 나이나 건강에 따라 다르겠지만, 7,80세가 되면 누구나 자연의 섭리로 인해 이 땅을 떠나야 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보다 먼저 가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이 땅의 축복보다 영원히 살아야 하는 천국에서의 축복을 대비하여 준비하는 사람이 더욱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마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 땅에서의 축복은 부지런히 일하며 애쓰고 노력하며 지혜롭게 살아간다면 어느 정도 충족될 것이지만, 하늘나라의 축복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지혜와는 거리가 있다. 그보다 하늘나라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의 안락하고 평안한 삶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국에서의 축복을 얻기 위해 의의 고난을 자처하기보다, 형식적인 신앙행위에 만족하고 눈으로 보이며 피부를 느껴지는 이 땅에서의 축복만을 좆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공의로 판단하시며 올곧게 자신의 원칙을 적용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의 축복과는 다른 조건을 충족시켜야 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천국에 가면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좌우편에 앉아서 휘황찬란한 금 면류관을 쓰고 많은 상급을 받아 누리며 살고 있을까? 거대한 대형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일까? 아님 방송에서 인기가 높은 유명한 설교자일까? 물론 이들도 그런 모습일 수도 있겠지만, 성경의 잣대에 의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그분의 의를 위해 일생을 헌신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대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겉으로 화려하고 인기 있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이미 대가를 받았을 확률이 많기 때문에 천국에서 의외로 초라한 대접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의를 위해 이 땅에서의 삶이 고단하고 힘들었던 사람들은,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엄청난 상급을 마련하고 환대하며 베풀어주실 것임이 틀림없다. 이 땅에서 아무도 그를 대접하고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국에서의 축복을 위해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어둡고 그늘진 곳을 찾아 하나님의 뜻을 시행했던 사람들이 더욱 행복할 것이다.
의로운 고난은 생명의 문으로 열려 있다.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성경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좁다는 것은 분명하게 말한다. 좁은 문이라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이 들어갈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천국에서의 행복한 삶을 믿어 의심하지 않겠지만, 이러한 환상을 깨뜨리는 말씀이 성경 곳곳에 나타난다.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가 주일마다 교회에서 정겹게 얼굴을 맞대고 보는 사람들 중에 천국에서보지 못할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천국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수효가 제한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원칙에 의하면 의의 고난을 회피하고 달콤한 축복의 열매만을 찾은 사람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의로운 고난이란 무엇일까? 그리 어려운 내용은 아니다. 어릴 적부터 설교 때마다 숱하게 들어왔던 내용이고, 예수님의 제자라면 응당 짊어져야할 십자가의 의무로 예전부터 알고 있던 것들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불쌍하고 가난한 이웃들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재물을 나누어주고 흔쾌히 베풀기를 아까워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소중한 돈을 하늘곳간에 쌓아 놓을 헌금으로 기꺼이 바치고,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는 이유로 배우자와 자녀, 부모형제와 친척, 친구와 이웃으로부터 냉대와 질시와 조롱을 받고 심지어는 직장이나 조직에서 왕따를 당하고 불이익을 받는 일들이다. 어디 그뿐일까? 조용히 잠자코 있으면 좋았을 텐데, 원하지 않는 주변사람에게 전도하느라 이를 싫어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과 증오의 빌미를 던져주어 예기치 않은 손해를 당하는 것도 다반사이다. 휴일이나 휴가도 반납하고 소중한 가정과 가족을 위해서 사용해야 할, 아까운 시간과 적지 않은 비용을 들이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선교의 꿈을 품고 위험하고 적대적인 이방나라에 가서까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면 생명이 위협당하는 일도 기꺼이 받아 들여야 한다. 행복과 성공을 위한 자기중심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으로 살기위해 자신의 욕망과 소원을 포기하는 일이 그중에서도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다. 이를 실천하면서 맞닥뜨리는 온갖 고난과 시련을 담담하게 받아드리고 원망하고 불평하기보다 기뻐하며 감사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미련하고 어리석을 뿐 아니라 정신 나간 광신자의 미친 행위로 오해 받기도 한다. 세상이 추구하는 길과는 확연하게 다른 길이기에, 그 길은 좁은 길이며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은 수효가 적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 등록을 하고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기만 하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천국의 시민권이라면 그리 좁은 문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렵지 않을지 몰라도,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은 많은 것을 내어주고 희생해야하는 고생스럽고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이를 위한 고난을 회피하고 거절한다면 하늘의 복도 주어지지 않다는 것을 잊지말아야한다.
견고한 믿음으로 무장하라.
히 11:36~38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위의 순교자들은 하나님의 의를 위해 최악의 삶을 살다 간 사람들이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혹은 복음을 전파한다는 구실로 옥에 갇혀 심한 고문으로 생명을 잃는 일이 허다하였다. 박해를 피해 가정과 재산, 부모 형제를 버리고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삶도 험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 땅에서의 혹독한 의로운 고난의 대가로 천국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되었다. 이들이 그러한 능력을 갖게 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온갖 회유와 협박과 공갈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게 운명을 받아들인 힘은 다름 아닌 견고한 믿음에 있었다. 악랄한 고문과 잔혹한 형벌에도 이를 지탱하게 해 주었던 힘의 원천인,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들이 흘린 순교자의 피는 거대한 강물이 되어 막강한 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기독교의 복음이 세계 방방곳곳에 흘러 퍼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로 돌아와, 우리는 조그만 손해나 사소한 힐난이 두려워 복음을 전하기가 쉽지 않다. 십일조를 드리는 손이 움츠려들고, 주일 하루조차도 봉사의 시간을 내라는 제안에도 얼굴을 감추며 피하기 바쁘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믿음만이 전부인 것으로 아는 우리기에, 다른 희생과 고난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성경을 관통하며 줄기차게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를 구세주를 믿는 것은 필요조건이고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면 천국에 자리가 없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즉, 견고한 믿음이 없다면 의로운 고난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안타깝게도 천국의 상급은 물론 아랫자리 하나도 차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의로운 고난을 받아들이기 위한 믿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굳세고 깊은 믿음의 밑바닥은 예수님께 닿아있으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과 보혈의 의미를 철저하게 깨닫는 자만이 감사와 기쁨이 생수처럼 터져 나오며, 산을 옮길만한 견고한 믿음의 능력이 생긴다. 이는 단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의 형벌에서 돌아가신 것에 대한 고마움의 느낌만은 아니다. 이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되겠지만, 예수님이 흘리신 십자가의 보혈의 깊은 의미를 묵상하고 깊이 깨닫는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으로 체험하듯이, 근원을 알 수 없는 놀라운 기쁨과 함께 탄탄한 믿음의 힘이 샘솟는 솟구치는 현상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는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묵상하면서 점차 깨닫게 되는 것은, 그 십자가 사건의 심오한 의미와 보혈의 능력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되고, 그 후에는 신비할 정도로 놀라운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능력은 영구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며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과 동행하기를 애쓰며, 십자가 사건의 의미와 능력을 결코 잊지 않으려 애쓰는 자들에게만 계속해서 유지된다. 산을 옮길만한 견고한 믿음의 출처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 중심에 십자가의 보혈이 증명하고 있듯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사랑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 사랑을 확인하고 감격함으로 믿음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게 된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또 다른 견고한 믿음을 얻는 방법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이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녀 웬만한 성경의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성경지식은 있을지 모르나 성경의 능력에 대해 무지한 자들이 적지 않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우리가 성경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성경 내용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 성경 말씀의 은밀한 곳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능력은 아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고 일을 하신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은 단지 사건이나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존재를 나타내시고 깨달음을 주시고 믿음과 은혜와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을 읽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깨달음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동반해야 함은 물론이다. 말씀을 붙들고 깊이 묵상하며 간절히 깨닫기를 기도한다면, 성령님께서 가르치고 깨달음을 주시고 인도해주신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성경이 단지 어떤 사건이나 인물 등의 지식만을 알려주는 것이라면 위의 말씀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성경이 다른 책과 다른 것은, 말씀을 통해 우리의 생각을 감찰하여 깨우침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며 통찰력을 주신다. 또한 성품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견고한 신앙으로 성장시켜 주기도 한다. 즉 성경은 읽는 자가 적극적으로 학습해서 얻어지는 지식의 내용이 아니라, 말씀이 마음에 들어와 박혀 사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이는 읽는 사람의 학습능력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심오한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능력의 배후에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증명한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믿음을 견고케 해주는 말씀은, 얄팍한 지식이나 경험을 깨뜨리고 가슴속에 들어와 이성과 의지를 무너뜨린다. 그래서 이러한 경험이후에는 주변의 상황과 환경과 상관없이 믿어지는 놀라운 일이 생긴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은 단지 우리가 믿는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에 의해 바라고 기도하는 내용이 의심 없이 믿어지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있어야, 어떠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올곧게 펼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믿음의 조상들이나 순교자들은 모두 이러한 믿음을 소유한 자이들이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참고 견디는 성품을 길러라.
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만나면 맞서 싸우지 않고 피하곤 했다. 바울도 자신을 핍박하고 박해하던 유대인들을 피해 도망치기 일쑤였다. 싸울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맞서 싸운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숱한 조롱과 멸시, 학대, 체벌, 심지어는 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고 채찍을 맞으면서도, 저주하고 싸우려 하지 않고 참혹한 상황을 기도로서 참고 견디어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고난을 기꺼이 받으려 하는 사람들은 굳센 믿음과 더불어 어떤 역경에도 참고 견디는 성품을 길러야 한다. 참고 견디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약 1: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모든 믿음의 시련을 이겨내려면 그 믿음을 굳세게 하는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를 통해서 성품을 단련시키며 이해하고 용서하고 배려하는 사랑의 성품을 완성하게 한다. 그렇지만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고, 자신만이 최고라고 부추기며 상품과 서비스를 팔고자하는 광고에 길들여진 우리들은 인내를 배우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만 어려운 일이 닥치면 포기하고 주저앉는다. 인생의 험한 시련으로부터 인내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현실을 도피하거나 자살함으로 도망쳐 버린다. 어린 시절부터 가정이나 학교에서 시련을 이기는 훈련을 받지 않았기에 정작 시련다운 시련에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자신이 잘못해서 자초한 삶의 고난이든 스스로 선택한 의의 고난이든, 고난은 누구에게나 힘들고 어렵다. 고난의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은 살을 저미고 뼈를 깎는 고통이라도 이겨낼 수 있지만, 이러한 훈련이 되어있지 않다면 자그마한 어려움도 견디지 못하며 쉽게 포기한다.
크리스천에게는 어떤 고난이라도 이길 힘을 주시고, 이길 수 없는 시련이라면 피할 길을 주시며, 악한 영으로부터 지켜주시고 도와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그래서 앞이 안 보이는 암흑 속에서도 두려움이 없고 편안하다. 이 역시 고난을 통해 참고 견디는 능력이 생겨났으며, 어떤 혹독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결과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더라도, 이 땅의 삶에는 고난이 닥치기 마련이고, 하나님의 의를 각오한 이들이라면 의의 고난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기에 참고 견디는 성품을 몸에 배기를 바란다. 이 땅에서 얻는 의로운 고난이 클수록 하늘의 축복도 비례해서 클 것이며, 참고 견디는 성품을 기를수록 천국에서 받는 면류관과 상급이 더욱 빛날 것이다.
출 처 : 다음 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 신상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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