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시험을 통과하라 3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3:1-2)
야고보 당시만 해도 선생은 사람들로부터 크게 존경받는 높은 직책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부모는 이 세상의 생명으로 자식을 인도하지만,
랍비는 내세의 생명으로 사람을 인도하는 자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선생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선생이 이렇게 존경받는 좋은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될 수 있으면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그 이유는 선생이 더 많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특히 말을 통하여 일을 하는 직책인데
선생은 하는 모든 말들에 대해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
혀를 통제하면 생활 전체를 통제한다(3:3-5)
야고보는 말을 통제하면 삶 전체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세 가지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다.
말에 입에 물려 있는 작은 재갈을 잘 조정하기만 하면
커다란 몸체를 가진 말의 움직임 전체를 통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어마어마한 선체를 가진 배가 거대한 광풍에 떠밀려가는데,
아주 작은 키 하나를 잘 조정하면 배의 방향을 틀어서
광풍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조종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아주 작은 불씨가 온 언덕을 불밭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혀는 불의의 불(3:6-8)
말을 잘 통제해서 좋은 열매를 맺기 보다는 말을 통제하지 못함으로
화를 당하는 일이 훨씬 더 많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지옥과 같은 본성으로부터
불의의 불이 계속하여 솟아올라 혀에 담겨서 말을 할 때마다 뿜어져 나옵니다.
혀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가 행복으로 가득찼던 생의 바퀴를 확 돌려서 불행으로 빠트리고 맙니다.
혀의 이중성(3:9-12)
찬송하던 그 입에서 저주하는 말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세해 놓고(마 26:35),
세 차례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마 26:70, 72, 74).
우리의 모습은 집 밖에서는 성자인데, 집 안에서는 악마로 변신하지 않습니까?
어떤 샘은 계속해서 짠물이 나오고 어떤 샘은 계속해서 단물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매우 드문 일이지만 샘의 어느 지점에 이르면
각각 다른 근원으로부터 잔물과 단물이 동시에 나오는 곳도 있습니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샘입니다.
무화과나무를 심으면 무화과가 열리고 포도나무를 심으면 포도가 열리는 법이지,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가 열렸다고 감람열매가 열리거나
포도나무에 포도가 열리다가 무화과가 열리는 법은 없습니다.
한 나무에서 전혀 질이 다르고 다른 두 열매가 맺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이 나면 두 번 다시 해서는 안될 말을 합니다.
성난 사람들은 지독한 욕설을 퍼붓습니다.
우리의 혀가 길들여지기 위하여 기도하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오순절날 다락방에서 열심히 기도할 때 성령이 가 사람들의 위에 임하자
다른 방언을 말하게 되고 입술들이 열려져서 하나님을 찬미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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