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강도에게서 배운 철학
변호사인 나는 남들이 혐오하는 파충류 같은 존재들을 검은 지하 감방에서 종종 만난다. 의사가 흉하게 부서진 환자를 보듯. 오래전 청송교도소에서 만났던 한 강도범의 얘기를 쓰려고 한다. 백팔십센티의 큰 키에 근육질의 그는 교도소 죄수 천 팔백명의 대장이었다. 한밤중에 칼을 들고 그가 내 방을 찾아왔다면 아마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낮에 감방안에서 만나면 아무렇지도 않다. 그는 나를 만나자 마자 이렇게 말했다.
“스물다섯살 혈기 왕성한 때 감옥에 들어와서 지금 나이 사십입니다. 앞으로 칠 년쯤 더 살아야 합니다. 건달 친구가 한탕만 잘하면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다고 해서 그 유혹에 빠졌었죠.”
“강도한 내용을 알고 싶은데요.”
나는 그가 사람을 해쳤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강도도 여러 종류였다. 용서받을 수 있는 강도와 짐승 수준도 있었다.
“원래는 배달 일을 했어요. 그러다가 건달친구와 함께 신흥주택가에 강도질 하러 들어갔죠. 그집 부엌 빨래건조대에 널려있던 블라우스로 복면을 하고 도마 위에 놓여있던 칼을 들었죠. 처음이라 그런지 강도인 내가 오히려 덜덜 떨리더라구요. 같이 간 건달친구가 나보고 방으로 들어가라고 하더라구요. 자기는 망을 보겠다면서요. 저는 방에 들어갔죠. 아이를 데기고 부부가 자고 있었어요. 저는 그 부부를 깨워 돈을 내놓으라고 했죠. 여자가 돈이 없다고 하는데 진짜 같더라구요. 그때 탁자 위에 돼지 저금통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거라도 뜯었죠. 동전들이 쏟아져 나오더라구요. 그걸 주머니에 쑤셔 넣는데 여자가 내일 아침 우리 애들 차비도 없는데 그걸 다 가져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사정하더라구요. 마음이 약해졌죠. 그때 망을 보던 그 친구가 방으로 들어오면서 그 말을 들었어요. 그 친구는 여자에게 ‘지금 우리를 놀려? 애가 다쳐도 괜찮다는 거지?’라고 겁을 줬어요. 그 말에 여자가 펄쩍 놀라면서 장롱 뒤에 숨겨두었던 돈보따리를 얼른 꺼내 주더라구요. 그 집의 잔대금을 치를 돈이래요. 첫번째 범행에서 큰 돈이 들어왔어요. 배달을 하던 내가 룸쌀롱에 가서 이백만원을 쓰면서 술먹고 춤을 춰 봤죠. 며칠 안가서 잡히고 중형을 선고받고 지금까지 사는 거죠.”
나는 그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삼 년 동안은 좁은 감방에서 닥치는 대로 부수고 반항했어요. 같이 징역 사는 다른 놈들도 다 미웠어요.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감옥 안에서 버티려니 막연했어요. 그러다가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하루에 서너권씩 독파했어요. 밤을 새우는 날도 많았죠. 저로서는 책을 읽는 행위가 그 많은 허무한 세월과의 싸움이었죠. 책에 미쳤어요. 워낙 많이 읽으니까 언젠가부터는 의식이 달라지더라구요. 나 같은 놈이 사회에 더 있었더라면 분명히 사형당했을 것 같았어요. 그런 마음이 드니까 감옥에 있는게 차라리 나를 살려준거구나라 하고 위안이 되는 거예요.”
독서가 인간 변화시킨 현실을 보고 있었다. 사서삼경이 동양적인 선비의 의식을 만들어냈다. 불경이 몇억이 되는 동양인의 마음을 바꾸었다. 서양에도 볼테르 루소등 계몽사상가의 책을 읽고 변화한 존재들이 많았다. 그게 다일까?
나는 마음을 열고 귀를 곤두세운 채 그의 말을 계속 듣고 있었다.
“어머니가 일흔 두살인데 길가에서 김밥을 팔아요. 그 노인네가 머나 먼 여기 청송교도소로 면회를 와서 저를 위해 매달 적금을 부우신다는 거예요. 제가 석방이 되면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생활비래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동자가 잠시 뿌예지는 느낌이었다.
아들을 놓지 않는 늙은 엄마의 사랑이었다.
“저 말이죠. 그동안 일급 모범수가 됐고 교도소 안에서 돈도 제일 많이 벌었어요. 이 안에서 하루 일당이 팔백원이예요. 십오년 동안 노동을 해서 이백만원을 벌었어요. 강도를 한날 빼앗은 돈으로 하룻밤 룸쌀롱에서 썼던 돈의 액수와 똑같아요. 같은 이백만원이라도 강도와 노동을 해서 번 돈은 차원이 달라요. 그 돈을 가지고 눈이 하얗게 내리는 날 우리 어머니를 찾아가고 싶어요.”
그는 나의 살아있는 철학선생이었다. 그는 내게 강취한 돈과 노동으로 뺏은 돈의 차이를 알려주었다. 사람이 책을 만들지만 책이 사람을 만든 실제 예를 보여주었다. 감옥안에는 독서인들이 많다. 지방신문사의 간부를 하던 어떤 사람은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될 때 백권의 책을 읽겠다고 계획했다. 매일 하루종일 열심히 책을 읽었다. 칠십권째 책을 독파하는 날이었다. 교도관이 철문을 열고 그를 나가라고 했다. 그는 독서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나온 걸 아쉬워 했다. 이 글을 쓰면서 소리 없이 눈이 내리는 날 감옥 앞에서 늙은 엄마를 만나 길을 떠나는 모자의 뒷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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