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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노년적 초월

Joyfule 2024. 5. 20. 20:49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노년적 초월

 

 

실버타운에서 저녁을 먹은 후 육십대 부부와 얘기를 나누었다. 육십대면 젊은 편에 속한다. 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실버타운에서만 지내는 건 답답해요. 요양보호사 자격을 따고 일자리를 얻었어요. 치매나 몸을 못 쓰는 노인들을 돌보는 거죠.”​

실버타운의 육십대는 아직 일하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실버타운 안의 잘 가꾸어 놓은 잔디정원이나 골프장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비슷한 또래의 또 다른 부인한테서도 일에 관한 이런 얘기를 들었다.​

“저는 주민센터에 일하러 다녀요. 쇼핑백에 플라스틱 손잡이를 붙이는 일을 했어요. 하루 다섯 시간 일하고 삼만원 받아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노인이 많아서 그런지 한 달에 구일 밖에는 일을 주지 않아요. 그래서 일자리를 바꿨는데 지방 도서관의 계약직 사서 자리를 얻었어요.”​

육십대 부인들에게 외부의 일자리는 삶의 생기를 얻는 또 다른 의미인 것 같았다.​

미국에서 역이민을 온 칠십대 중반의 부인과 얘기를 나누었다. 그 부인은 이민 생활을 담은 글을 써서 자식들에게 책을 남기고 싶은 소망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써 온 글들을 내게 건네주면서 의견을 말해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그 부인이 쓴 글들을 읽었다. 독특한 체험 몇개가 담긴 글들이 보였다. 이민 초기 무렵 그 부인은 공장에 가서 단순노동을 했다. 옆에 있는 백인 여성이 유난히 그 부인을 바보 취급하고 업신여겼다. 어느 날 그 백인 여성과 둘만 엘리베이터에 있는 순간이 있었다. 그 부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엘리베이터 내부에 씨씨티브이는 없었다. 순간 부인은 그 백인여성에게 튀어 올라 머리채를 잡고 늘어졌다. 맨 아래층에서 다시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릴무렵 그 부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점잖게 빠져나가 자신의 사무실로 갔다. 다음날 그 부인의 책상에는 메모가 한장 놓여있었다. 그 메모에는 ‘아이 엠 소리’라고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내용이었다. 강한 자존심과 독특한 인생관을 가진 것 같았다. 글의 행간에는 이민 생활의 절박함과 슬픔이 축축하게 배어 있었다. 그 부인은 늦깍이 작가가 되어 책을 만들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

남자노인들도 다르지 않다. 서울의 최고급 시설의 실버타운에 묵는 팔십대 초반의 변호사가 있다. 고등법원장을 지낸 분이다. 그분은 실버타운에서 아침을 먹고 하루종일 적막한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저녁이면 실버타운으로 돌아간다. 수영장이 있고 골프장이 있고 여러 편의시설은 그에게 별 관심 대상이 아닌 것 같다. ​

개발 시대를 살아온 우리들은 내남없이 ‘일중독’ 증상이 있었던 것 같다. 뭔가 하지 않으면 하루를 헛산 것 같은 강박증 비슷한 증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팔십대 중반의 한 노인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

“저는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와 자식 남매를 데리고 무작정 상경을 해서 난곡 철거민촌에 살았어요. 노동을 하고 살았죠. 땅이 꽁꽁 얼어붙은 일월이었어요. 겨울이지만 저는 하루라도 일을 쉬고 싶지 않았어요. 일을 찾아 나섰다가 우연히 전신주를 땅에 묻는 공사장을 지나치게 됐죠. 공짜로 일을 해 주겠다고 하고 곡괭이로 땅을 팠죠. 그렇게 하니까 공짜가 공짜가 아니더라구요. 다음에는 일을 주더라구요.”​

그 노인은 서울에 오층빌딩을 가지고 있었다. 일층은 기독백화점이고 이층은 성화 전시장이었다. 그 노인의 노동으로 이룬 결실이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일본 노인들도 일에 대한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몇 년 전 도쿄올림픽 성화봉송주자는 백네살의 하코이시 시쓰이 할머니였다. 그 노인은 천구백삼십사년 열여덟살에 이발사 자격증을 딴 이후 팔십칠년간 이발사를 해 왔다. 그 할머니는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이발사를 그만둬야 할까 고민했지만 단골손님의 예약을 거절할 수 없었어요. 할 수 있을 때까지 가위를 들고 싶어요. 건강 비결 중 하나는 손님과 즐겁게 대화를 하는 거죠. 자칫 손이 떨릴 수도 있기에 가위를 들 때에는 항상 긴장하며 집중합니다.”​

아담스미스 연구로 유명한 백두살의 미즈다 히로시 나고야 대학 명예교수가 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학문의 깊이를 더 파고들고 싶지만 신체가 따라주지 않아 속상해요. 손을 들기조차 힘들 때가 많아요. 그렇지만 최후까지 연구를 계속하고 싶어요.”​

개발시대를 함께 살다가 노인이 된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일에 대한 열정이 아직도 남아 있다. 실버타운을 소개하는 방송들을 보면 아름다운 그 주변 환경이나 편의시설 의료기관과의 연계 그리고 비용들만 주로 소개되는 것 같다. 과연 겉으로 보이는 그게 다일까. 파란 잔디 위의 벤치에 손을 잡고 있는 노부부는 그런 연출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실버타운에 사는 노인들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골프를 치고 여행을 다니는 것일까. ​

실버타운에 있는 마음이 건강한 노인들을 보면 돈에 대해 더 이상의 관심이나 집착이 없는 것 같다. 있는 돈을 주변에 잘 쓰고 갔으면 좋겠다고 한다. 왕년에 가지고 있던 사회적 지위나 역할도 의미가 없는 걸 안다. 현명한 노인들은 늙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주변의 작은 일들을 찾는다.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내면의 성취감이다. 심리학자들은 그걸 ‘노년적 초월’이라고 부른다고 한다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