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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걷는 행복

Joyfule 2024. 1. 27. 13:03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걷는 행복


쨍쨍 내려 쬐는 뜨거운 햇빛 아래서 얼굴이 하얗게 바랜 그 노인은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내고 있었다. 한 발을 내딛기 위해 입으로 “하나, 둘, 셋, 넷” 구령을 부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하다 보면 발이 한 두걸음씩 떨어지곤 했다. 파킨슨병에 걸린 그의 얼굴에서는 섬뜩한 삶의 의지가 엿보였다. ​

매일 우면산의 산자락길을 걸었던 적이 있다. 내가 올라갈 때 마주치는 남자가 있었다. 한쪽 다리가 마비된 것 같았다. 나무기둥 같은 그 다리를 끌면서도 그는 쉬지 않고 야산을 오르내렸다. 한번은 그가 산길 흙 계단을 걸어 내려오다 엎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일어서서 또 걸었다. 어떤 때는 얼굴에 넘어져서 생긴 푸른 멍자국이 보이기도 했다. 그가 야산을 오르는 것은 보통 사람이 히말라야라도 오르는 것 같은 의지와 에너지가 필요할 것 같았다. 한번은 그와 잠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원래 건강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다리에 마비가 왔다는 것이다. 의사는 신경이나 다리의 근육에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도 다리는 기능을 멈추었다는 것이다. 그 의지의 사나이가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 ​

갑자기 중풍을 맞은 대학 동기가 있다. 팔다리가 마비됐다가 조금씩 풀려 지금은 재활 운동을 하고 있다고 내게 연락을 했다. 전화를 통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중에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재활병원에 와 보니까 나 같은 환자가 수백명이 있어. 재활을 위해 하루에 세 시간 이상씩 운동을 해. 여기 사람들 소원은 흔들리고 쓰러져도 혼자 걷는 거야.”​

대단한 운동시간과 운동량이다. 그 목적은 흔들리고 쓰러져도 혼자 걷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산에서 뻐쩡 다리로 혼자 내려오다가 쓰러지는 남자도 파킨슨병에 걸려 한걸음이 천리 같은 노인도 그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아닌가. ​

걷지 못하는 원인은 병만이 아니다. 법이 걷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변호사인 나는 이십년이상 독방에서 혼자 감옥생활을 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작은 철창을 통해 교도소의 높은 담벽이 보이고 그 아래 먼지 낀 잡초들이 보여요. 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날이면 그 담벽 아래 흙길을 걸어보고 싶어요. 바로 눈앞에 보이는 가까운 곳인데도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게 감옥입니다.”​

몇년 후 그가 석방이 되고 나를 찾아왔다. 그의 얼굴은 환하게 펴지고 신이 나 있었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성남에 쪽방을 얻어서 살고 있어요. 저녁이면 꼭 산책을 나가요. 쓰레기 더미가 쌓이고 신문지가 바람에 날리는 더러운 뒷골목인데도 나는 너무 행복해요. 마음대로 걸어다닐 수 있기 때문이죠. 감옥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기쁨을 모를 거예요.”​

하얀 것은 검은 것 과의 대비를 통해 자신을 알고 더욱 하얘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걷지 못하는 그들을 보면서 걸을 수 있는 나의 행복을 깨달았다. ​

십여년 전 일을 보러 여의도에 갔다가 한강을 따라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저녁노을이 스며드는 강물이 마음을 열고 내게 뭔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나는 강물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으며 한번 끝까지 가보고 싶은 마음이 솟아올랐다. 어두워지는 호젓한 강가를 계속 혼자 걸었다.​

밤이면 강가의 모텔을 찾아 들어가 자고 다음 날 아침이면 또 물안개 피어오르는 푸른 강가 길을 걸었다. 노란 들꽃이 가득한 여주 강 옆의 들판에 누워 하늘을 보면서 행복했다. 존재와 비존재가 섞여 드는 저녁 어둠이 좋았다. 그렇게 충주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온 적이 있다. 그때 걷는 행복을 알았다. 행복할 때 사람들은 그 행복을 느끼기 힘든 것 같다. 마치 물속에 있는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못하듯. 불행해져야만 행복을 알아차린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의 사소한 것들의 즐거움을 하나하나 실감해 갈 수 있다면 그게 행복해지는 길은 아닐까. 이십대 젊은시절의 꿈 하나는 배낭을 지고 동해바닷가를 걸어서 방랑하는 것이었다. 노인이 되어 한적과 여백을 즐기려는 요즈음 그 꿈을 조금씩 실현해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