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검은 은혜
어려서 부터 알던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나 간암이래. 의사 말이 간 이식수술을 해야 할 것 같대. 기도 해 줘”
그의 어조에서 죽음 앞의 간절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간을 제공할 사람이 있는 거야?”
“딸이 간을 내놓겠다고 하는데 애비로서 할 짓인가 싶어”
그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애잔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동네 친구였다. 일 년에 몇 번씩 만나 밥을 먹었는데 우정이 이어져 오는 셈이었다. 그는 열심히 돈을 벌고 절약하면서 부자가 됐다. 그러나 생명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속의 장기가 탈이 나면 죽는 것 같다. 얼마 전에도 내 또래의 친척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깊은 산골에 황토집을 짓고 몇 년간 암과 싸우면서 잘 버티더니 가버렸다.
나는 친구가 간이식 수술을 받을 때까지 겪을 불안과 공포를 어떻게 줄여 줄까 생각하면서 말했다. 그는 워낙 나를 좋아해 주고 따랐다.
“너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걸 해라. 그러면 넌 분명히 살 수 있을 거야.”
“그게 뭔데?”
“당장 공책을 사다가 지금부터 성경 속 시편 23장을 천번을 목표로 써 봐. 미신 같은 얘기일 수도 있지만 그걸 쓰면 너는 분명 살아날 거야.”
“나는 너를 절대로 믿어, 친구. 지금 당장 할 거야.”
나도 암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수술을 받을 때까지의 회색의 시간을 견디기 어려웠다. 갑자기 불쑥 찾아오는 암이란 손님은 어떤 것일까. 나는 그걸 통해서 세상을 다시 보게 됐다. 고교동기 중에도 간이식 수술을 통해 삶의 궤도가 바뀐 친구가 있다. 변호사인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간경화가 간암으로 바뀌면서 극심한 고통이 올 때 차라리 죽는 게 행복할 것 같았어. 만사가 귀찮고 죽을 운명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어.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니까 자살하기도 힘들더라구. 막상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으니까 신의 존재를 절실하게 묻게 되더라구. 하나님이 있고 다른 세상이 있다면 안심하고 저승으로 갈 거 아니야? 그런데 확신이 서지 않더라구. 삶에의 의지도 없고 죽음에 대한 각오도 없었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저주와 악담만 튀어나왔지. 모든 걸 체념하고 방에만 누워 있었어.”
그는 고교 시절 일등을 빼앗긴 적이 없는 뛰어난 수재였다. 일찍 고시에 합격하고 잠시 검사를 하다가 변호사를 개업했다. 죽기가 억울한 게 당연했다. 나는 그의 다음말을 귀기울이면서 기다렸다.
“어느 날 밤 한 시경이었어. 약간 열린 문틈으로 거실이 보였어. 그 구석에서 촛불을 켜놓고 어린 딸과 아들이 우리 아빠를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거야. 우리 아빠는 좋은사람이라고 하면서 말이지. 그걸 보니까 눈물이 주루륵 흐르더라구.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
그래서 아파트를 팔았지. 급하게 파니까 거저먹으려고 하더라구. 할 수 없었어. 미국으로 건너가 교통사고로 죽은 흑인 청년의 간을 이식 받았지. 재산도 다 없어지고 몸이 쇠약해져서 업무도 제대로 못하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 세상은 살만하다는 걸 알았어.”
암이란 하늘로 오라는 초청장이 아니면 삶의 궤도를 바꾸라는 그분의 메시지인 것 같았다.
간 암이라면서 내게 알려왔던 어릴 적 동네친구가 간 이식 수술을 받은 다음날 그에게 전화를 해 수술경과를 물었다.
“지금 중환자실에서 회복중인데 네가 시키는 대로 시편 23장을 썼어. 간 이식수술 도중에 어떻게 된 건지 의식이 돌아오더라구. 아팠어. 그런 중에도 시편을 입으로 계속 암송하면서 기도했어. 의사들이 수술이 아주 잘됐대. 혈관이 문제였는데 워낙 상태가 좋아서 별 어려움이 없이 수술이 성공했다는 거야. 보통은 병원에서 경과를 보기 위해 한 달은 입원해 있어야 하는 데 나는 빨리 퇴원을 하라고 그러네”
친구의 믿음이 그를 살린 것 같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나 이제 다르게 살 거야. 여태까지 돈을 벌려고만 했는데 이제 좋은데 쓸 거야. 이봐, 친구 이사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내가 선물 하나를 꼭 사주고 싶어. 정말 받아줬으면 좋겠어.”
암이라는 존재는 사람의 영혼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버리는 하나님의 도구 아닌가 모르겠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렇다면 그건 불행이 아니라 검은 은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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