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마음 방에서 타는 불

Joyfule 2024. 6. 24. 19:40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마음 방에서 타는 불  

 

실버타운에서 생활한 지 이 년이 넘어간다. 동해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의 파란 잔디가 펼쳐진 낙원 같은 곳이다. 그런데 정말 이곳은 낙원일까.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걸 봤다. 숨이 차는지 입을 약간 벌리고 있다. 들어오고 나가는 숨소리에 쇳소리가 섞였다. 죽음이 어른 거리는 느낌이다. 공동식당에서 만난 또 다른 노인은 “마음이 춥고 아파요”라고 내게 말했다. 노인들은 마른 잎이 몇 개 매달려 차디찬 바람에 시달리고 있는 겨울나무같이 스산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

스산한 곳은 실버타운만이 아니었다. 변호사를 하면서 교도소를 드나들다 보면 그곳도 얼어붙은 곳이었다. 노인과 죄수들만 마음이 추울까? 청춘은 뜨거울까? 내 젊은 날을 보면 춥고 우울한 적이 많았다. 좌절하고 열등감에 시달릴 때 들판에 혼자 선 허수아비 같은 공허를 느꼈다.​

세월이 가고 늙어도 사람들 속에는 추워하면서 우는 소년이 있다. 다섯살 때의 내 사진과 칠십이 넘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전혀 다른 존재다. 그런데 의식의 내면에 있는 방 속에 있는 아이와 나는 하나다. 누가 본체이고 누가 그림자인지 모르겠다. 내 속에서 추워서 떨고 있는 그 아이를 따뜻하게 해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얼마 전 의학드라마에서 우울증에 시달리는 여성이 매일 칭찬일기를 쓰는 걸 본 적이 있다. 마른 잎이 비를 만나듯 사람도 칭찬을 받으면 살아나는 것 같다. 내 의식 속에서 추워하는 아이를 따뜻하게 해주려면 사랑의 불을 지펴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 아이가 사랑받았던 일기를 쓰면 어떨까.​

아프고 슬픈 기억들은 인식의 벽에 깊이 새겨져 그대로 남아있다. 그런데 사랑의 기억은 모래 위의 글씨처럼 쉽게 지워졌다. 나는 내면의 방으로 들어가 추워하는 아이와 만난다. 내면의 방 흰 벽이 스크린이 되어 영화 같은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흰 눈이 두껍게 덮인 깊은 산자락의 두 칸 초가집이 나타난다. 예배당의 종이 투명한 소리를 내며 창호지를 바른 문틈으로 스며 들어온다. 다섯살의 아이인 나는 눈길을 걸어서 작은 예배당으로 간다. 작은 창고 같은 건물이다. 서울서 왔다는 젊은 전도사님이 손으로 직접 그려 만든 종이인형을 촛불에 비쳐 벽에 그림자가 비치게 하면서 동화를 들려준다. 나는 소공자 소공녀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그 전도사님이 서울로 올라갈 때 차부까지 따라갔다. 그는 어린 나를 꼭 안아 주었다. 솜같이 포근하고 따뜻했다. 천국의 향기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내 귀에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란다. 하나님은 몸이 없으시지. 나를 통해 너를 이렇게 안아주는 거란다.”​

하나님은 하늘에만 있는 게 아니다. 와글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사랑으로 존재한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다. 그분은 마음 속 방의 벽난로에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 속 어딘가에 숨어 추워하는 우리들과 같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마음속에서 미세한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동안 받은 수많은 사랑을 떠올려보라고. 그러면 내면에서 불이 활활 타오를 거라고.그럴 때면 마음속 방이 뜨끈뜨끈해졌다.​

대도라고 불리던 거지 출신의 늙은 절도범을 변호한 적이 있다. 그에게 가장 따뜻한 기억을 물었었다.​

“일곱 살때 깡통을 들고 밥을 얻으러 다니던 거지였죠. 서울역 앞 지게꾼 아저씨 한 분이 항상 웃으면서 나를 예뻐했어요. 그때 따뜻했던 것 같아요. 나머지 세월은 평생 감옥에서 춥죠.”​

나는 전국을 긴장하게 했던 유명한 탈주범을 변호하기도 했었다. 그의 내면에 있는 소년의 입속에는 고드름이 가득 달려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속에 작은 불씨를 피우기 위해 그의 따뜻했던 기억을 물었다.​

“초등학교 삼학년 때 친구네 집에 갔어요. 그 아이 엄마가 죽은 우리 엄마 비슷했어요. 친구 엄마가 먹을 것도 주고 돌아올 때 친구가 입던 헌 옷도 줬어요. 마음이 따뜻했는데 지금도 잊혀 지지 않아요.”​

옛날을 회상하면서 그의 얼어붙은 마음이 약간 녹는 것 같았다. 인생이란 얼마나 많은 횟수의 숨을 쉬었느냐 보다 숨막힐 듯한 사랑을 느꼈는가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 각자 마음의 방으로 들어가 추워하는 소년과 함께 사랑의 불을 피워야 하지 않을까. 그 안의 어디에서 그분이 따뜻한 시선으로 내려다 볼 것 같기도 하다.